오피니언
[청년이 묻다] 불평등 고용시장 바로잡기, ‘한국판 동등대우법’ 도입을

더나은미래 창간 15주년을 맞아 사회적협동조합 ‘스페이스작당’과 함께 연재하는 <청년이 묻다, 우리가 다시 쓰는 나라>에서는 안보·사회·공동체·상생 네 분야에서 청년 12명이 직접 제안한 구체적 정책 대안을 소개합니다. 이들이 고심 끝에 내놓은 구체적 대안들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미래세대를 위한 사회계약의 초안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어떤 사회를 상상하고 있을까요. 그 상상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다시 써야 할 미래의 서문입니다. /편집자 주 대선이 한창이다. 후보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발이 닳도록 전국을 누비며 ‘새로운 사회’를 약속한다. 낡은 문제에 대한 해법은 늘어나지만, 정작 하나뿐인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는 제각각이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수십 갈래인 양, 각 당의 후보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길을 자신 있게 제시한다. 그러나 정답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스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문제도 뜨거운 감자다. 비교적 안정적이고 양질의 일자리인 1차 시장(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공무원·전문직)과 열악한 2차 시장(중소기업 비정규직·일용직·플랫폼 노동) 사이의 임금·복지 격차는 한국 사회 불평등의 근원으로 지목된다. 특히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과 정규직·비정규직 간 처우 격차는 OECD 최고 수준이다. ◇ 역대 대선 후보들의 ‘이중구조 탈출구’ 공약 살펴보니 역대 대선에서 비정규직 해법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것은 ‘정규직 전환’이었다. 그러나 무기계약직 전환을 통한 고용 안정성 강화가 처우 개선으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었다. 계약 만료로 쉽게 해고되지 않는 정도를 제외하면, 실질 임금 격차나 복지 혜택 차이는 대부분 남아 있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선자는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썸네일 가로형
[영리한 비영리] 정치는 흔들려도, 시민사회는 단단하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민사회는 위태로워진다. 예산이 끊기고, 사업이 중단되고, 단체는 해산된다. 지난해 사회적경제 분야 예산은 대폭 삭감돼 현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24년 고용노동부의 사회적기업 지원 예산은 전년(2022억 원) 대비 60% 줄어든 786억 원에 그쳤다.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 예산은 411억 9000만 원에서 88.7%나 삭감돼, 고작 46억 7000만 원이 배정됐다.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육성 예산도 69억 6000만 원에서 26억 9000만 원으로 줄었고, 중소벤처기업부의 사회적경제 기업 성장 지원 예산은 아예 0원이 됐다. 지자체도 다르지 않았다. 2022년 12월 서울시의회는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 조례 폐지조례안’을 통과시켜 마을공동체사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현재 마을공동체사업과 주민자치 지원은 서울시에서 사실상 종료됐다. 정책은 곧 사라졌고, 현장에서 쌓은 성과도 함께 무너졌다. 결국 피해는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장애인, 고령자, 한부모 등 취약계층을 고용하던 사회적기업들은 인건비 보조가 끊기면서 존폐의 기로에 섰고, 지역사회에서 이웃을 연결하던 마을 활동가들은 공간을 잃고 흩어졌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가던 지역의 생명력이 일순간에 침잠했다. 시민의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던 작고 지속적인 실천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 환경은 시민사회의 존속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시민사회는 정치가 흔들리거나, 정권의 변화에 따라 출렁인다. 문제는 구조다. 제도와 법률이 뒷받침되지 않는 시민사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사회적 신뢰의 약화, 시민 참여의 위축, 사회 혁신의 퇴보,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진다. ◇ 시민사회기본법을 통해 만드는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세대 다양성, 리더십의 시간은 지금이다

이번 달 유엔 청년 사무국과 로마클럽, 장크트갈렌 심포지엄이 공동으로 ‘세대 간 리더십이 비즈니스의 혁신과 지속가능성을 여는 방법’이라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번 보고서를 낸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로 잘 알려진 국제 싱크탱크이며, 유엔 청년 사무국은 전 세계 청년의 정책 참여를 제도화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 조직이다. 이들이 발간한 보고서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세대를 아우르는 리더십, 곧 ‘세대 간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보고서는 먼저 기업 내 리더십 구조에 존재하는 세대 간 불균형을 지적한다. 글로벌 CEO의 평균 연령은 56.8세, 이사회 구성원은 58~64세에 이른다. 반면, 전 세계 노동인구의 중간값은 39.6세에 불과하다. 미국 S&P500 기업 기준으로 50세 미만 이사는 5%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치는 단순한 연령 분포를 넘어, 기업의 장기 전략·기술혁신·조직문화 차원에서 구조적 리스크를 초래한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리더는 조직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는 다시 구성원의 판단과 행동을 좌우한다. 특정 세대에만 리더십이 집중될 경우, 이는 기업의 미래 대응력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 젊은 세대는 장기적인 사회·환경 과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술 변화에도 빠르게 적응한다. 이해관계자들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도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기업이 “우리는 MZ세대와 소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내 프로그램과 포럼, 설문조사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다고 주장하지만, 보고서의 질문은 더 본질적이다. “당신의 의사결정 구조에 모든 세대가 실질적으로 포함돼 있는가?” ◇ 세대 간 리더십, 기업에 가져오는 다섯 가지 변화 보고서는 세대 간

이재현 NPO스쿨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네왜문화’에서 ‘왜네문화’로 바뀐 비영리 현장의 과제

서구사회는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하면 부하직원이 ‘왜?’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상사가 그 이유를 납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네’라는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상사가 지시하면 우선 ‘네’라는 답을 하고 뒤돌아서 ‘왜?’라고 의구심을 가진다. 직무중심의 조직문화는 납득할 만한 직무를 부여할 때 업무가 작동하는 원리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직급중심의 조직문화란 사람 사이에 서열을 정해주면 업무가 작동하는 원리를 뜻한다. 따라서 전자는 이유가 중요하고 합의과정이 중시되어 능동성이 개입된다. 후자는 직급에 적합한 권한과 책임의 부여가 중요하고 일정한 당위성이 개입된다. 직무중심이냐 직급중심이냐의 기준으로 미국 기업문화와 일본 기업문화를 조망한 윌리엄 오우치의 Z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인한 조직을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은 수직인가, 수평인가라는 이분법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질서가 있는지(hierarchy, 하이어라키), 아니면 복잡하여 질서가 잘 드러나지 않는지(heterarchy, 헤테라키)에 대한 논쟁이 그 시작이다. 하이어라키는 서열을 뜻하는 위계(位階)로 풀이된다. 질서가 있으되 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상황을 일컫는 헤테라키는 혼계(混界) 또는 비위계라고 불린다. 혼계는 권한이 분산되고 협력과 유연한 작동이 가능하여 수평적 조직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혼계를 수평적 조직으로 단언하면 안된다. 그 이유는 수직적 조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수평적 조직으로의 변화를 급속히 이행하는 많은 경우 예기치 못한 변수와 왜곡이 불거지고 구성원들이 느끼는 피로감과 스트레스가 증폭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완벽한 수평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구현되지 않는 까닭이다. 혼계가 지향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완벽한 수평이라기보다 각자의 역할에 따른 행동이 보장되고 그 바탕 위에 서로 건강한 관계를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한국의 재단들도 ‘시빅 테크’에 투자할 때다

기술은 편리함과 효율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되면, 불평등은 심화되고 사회적 갈등은 더 깊어진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기술 발전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잃는 일도 발생한다. 기술은 산업과 시장을 위한 도구를 넘어, 더 나은 정부와 사회를 만드는 수단이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했다. 지금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기술이 어떻게 더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있다. ‘시빅 테크(civic tech)’는 공익을 위한 기술(public interest tech)의 한 분야로, 시민이 경험하는 정부 서비스를 기술로 개선하는 일을 말한다. 복지 신청에 걸리던 한 시간을 10분으로 줄이는 것, 시민이 법안에 직접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플랫폼을 설계하는 일, 지역 문제 해결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도구 설계 등이 대표적이다. 2006년 MIT 오픈코스웨어를 국내 대학에 도입하며 시작한 내 시빅 테크 활동은 올해로 19년째다. 201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현 C.O.D.E.)’에서 활동하며 오픈데이터와 디지털 전환, 사회혁신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해왔다.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미국의 학계와 공익 기술 현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민간 재단들이 기술 생태계 설계자 역할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공공을 위한 기술’이라는 실험의 출발점이자 성장 플랫폼 역할을 해낸 것이다. ◇ 코드 포 아메리카와 미국 기업 재단의 실험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 창업자가 만든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2000년대

[기후 유니버스] 대선후보의 기후공약, 무엇을 봐야 할까요?

대선후보들의 본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조기 대선으로 시간이 부족하지만, 유권자는 각 후보의 공약을 냉정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기후재난이 일상화되면서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높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지구 평균 온도가 파리협정 1.5도 목표를 일시적으로 초과했다고 밝혔다. 기후 마지노선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기술 현실성을 감안할 때, 화석연료 신규 프로젝트 중단과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한다. 산업·교통·건물 등도 중요하지만, 대통령 임기 동안 가장 시급히 집중해야 할 분야는 에너지다. 온실가스 감축은 미래세대에게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청년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이 관점에서 차기 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6가지 기후 공약을 소개한다. ① 탄소예산 기반 2035년 감축목표 수립 ‘탄소예산’이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특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인류가 배출할 수 있는 총 온실가스 양을 뜻한다. 올해 9월, 우리 정부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에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이하 NDC)를 제출해야 한다. IPCC 6차 보고서는 1.5도 목표 달성을 위해 2035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를 60% 감축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국내 기후단체인 플랜1.5는 한국의 목표 감축률을 최소 66.7%로 제안한 바 있다. 환경부는 관련 초안을 오는 6월 말~7월 초 공개할 예정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와 같은 혼란이 있었지만, 국제사회는 기후 대응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새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밝힐 감축 목표인 만큼, 한국의 기후 리더십에도 이목이 집중될 전망이다. ② 2049년까지의 장기 감축경로 법제화 2035년 목표뿐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파타고니아에서 만난 사람들

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의 작은 도시 벤추라에 본사를 둔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Patagonia)를 찾았다. 전현직 CEO와 CFO, 철학 담당 임원 등 주요 경영진을 직접 만나 대화할 기회였다. 2018년 파타고니아 코리아의 도움으로 첫 방문한 인연이 이어져, 한국에서 파타고니아의 경영철학과 행동주의 기업으로서의 운영 방식을 전파하는 활동을 했다. 작년에는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스쿨’을 열고 선후배들과 함께 공부하며 다시 이곳을 찾게 됐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한다.’ 1973년, 등반가였던 이본 쉬나드가 창립한 파타고니아는 이 신념을 지켜왔다. 유엔환경계획(UNEP)으로부터 ‘지구환경대상(Champions of the Earth)’을 수상했고, 세계 여러 지속가능성 지표에서도 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잉거 안데르센 UNEP 사무총장은 “파타고니아는 민간기업이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훼손, 지구 위협에 맞서 싸우는 데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오랫동안 파타고니아의 지속가능성을 책임져온 ‘거북이 할아버지, 릭 리지웨이’와의 미팅으로 일정이 시작됐다. 이후 초대 CEO이자 환경운동가인 크리스 톰킨스, 현 CEO 라이언 갤러트, CFO, 철학 담당 임원, HR 총책임자, 제품 총괄 사장 등 다양한 리더십과 일주일 동안 대화를 나눴다.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은 세 가지 질문을 공유하고자 한다. ◇ “우리가 만드는 제품은 지구에 도움이 되나요?” 얼마 전 창립 50주년을 맞은 파타고니아는 다음 50년을 준비하며 가장 중요한 과제로 무엇을 삼았을까. 파타고니아 철학 담당 임원이자 비즈니스 스쿨 교장인 빈센트 스탠리는 주저 없이 ‘제품 품질’을 꼽았다. 의류 제조업체로서 품질을 강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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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비영리] 재난을 이기는 희망, 회복탄력성과 비영리

삽시간이었다.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에서 시작된 산불은 빠르게 한반도를 불태웠다. 성묘객의 실화로 추정되는 산불은 강풍과 건조한 날씨를 만나 안동, 영덕, 청송 등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3월 28일 주불이 진화되기까지 산불은 149시간 동안 지속됐다. 이번 산불로 소실된 산림은 9만9490헥타르(ha). 여의도의 약 343배, 서울시 면적의 1.6배에 이른다. 산림청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산림이 생태적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최소 30년에서 100년까지 걸릴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조림을 넘어 생물다양성과 토양 복원을 포함하는 장기적 과제가 됐다. 인명 피해도 컸다. 사망자는 총 28명으로, 대부분이 60~80대 고령자였으며 진화 작업 중 헬기 추락으로 조종사 1명이 사망하는 등 구조 인력의 피해도 일어났다. 부상자는 71명으로 집계됐고 이 중 다수가 대피 중 불길에 휘말리거나 구조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한반도에 불어닥친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 기후위기, ‘불타는 한반도’로 돌아오다 이런 대규모 산불 발생의 이면에는 기후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건조한 날씨와 강풍, 그리고 인간의 부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국내 산불 피해 면적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2년 삼척 산불은 약 1만 6000 헥타르(ha)의 산림을 태웠고 복구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소요됐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면적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호주와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이례적인 규모의 산불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돌봄의 재발견] 밥은 밥솥이 하지만, 돌봄은 머리가 한다

그날도 머리를 너무 덜 쓴 게 문제였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던 13개월 아이를 두고 출근한 날이었다. 절대 빠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팅을 마치고 나서야 아이의 열이 높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동네 소아청소년과로 향했다. 북새통인 대기실에서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결국 열경기를 일으켰다. 공포에 휩싸인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겨우 안정시킨 뒤에서야, 병원에 오기 전 해열제를 먹였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모든 결정이 안일했다. 미팅이 정말 중요했을까. 조금 멀더라도 더 한산한 병원을 찾아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는데. 돌봄이란 거창한 단일 결정이 아니라, 크고 작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 후회는 언제든 찾아온다. ‘머리를 덜 썼다’는 자책은 육체적 피로보다 오래 남는다. ◇ 밥보다 힘든 건, 머리로 하는 돌봄 돌봄을 단순한 신체 노동으로만 인식한다면, “밥은 밥솥이 하지 않느냐”는 말도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돌봄 노동자의 머릿속이다. 냉장고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누가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언제 장을 볼 수 있을지, 식사 시간을 어떻게 조율할지, 업무 스케줄과 식사 준비를 동시에 고려하며 움직이는 ‘인지적 노동’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이다. 조직과 사회는 돌봄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루트임팩트는 이 복잡한 머릿속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정량 지표나 단편적 현상 이면에 있는 돌봄의 서사를 파악하고, 돌봄이 우리의 심리와 정서에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공 영역 인공지능, 쓰긴 쉬워도 잘 쓰긴 어렵다

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을 공공정책에 도입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미 연방정부는 2022년 회계연도에만 인공지능 관련 조달 계약에 20억 달러(한화 약 2조9200억 원)를 썼다. 불과 5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 국가 안보부터 복지 행정까지, AI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공공 자금이 인공지능에 투입되는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 도입 자체는 쉬울 수 있지만, 인공지능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잘 쓰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다양한 사례는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AI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 미국 공공 부문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알고리즘 기반 업무 자동화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 성공한 AI와 실패한 AI의 차이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우정공사다. 약 52만 명의 직원을 둔 미국 최대의 공공기관 중 하나인 우정공사는 하루 평균 3억1800만 통의 우편물을 전국에 전달한다. 따라서 업무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은 이 기관의 큰 과제다. 1990년대, 우정공사는 손으로 쓴 우편번호를 자동 분류하기 위해 신경망 기반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매일 약 5500만 통의 수기 주소 우편물을 98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로 처리했고, 1997년 한 해에만 1억 달러, 약 1460억 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이 사례는 잘 정의된 문제에 적절하게 설계된 인공지능이 막대한 공공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미시간주의 실업수당 시스템은 인공지능이 잘못 설계될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아이에게 좋은 투자는 결국 모두에게 좋다

“투자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최근 글로벌 임팩트 투자 시장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아동관점투자(이하 CLI, Child-Lens Investing)다. 단순히 아동을 위한 복지를 넘어, 아동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해로운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배분하는 전략이다. 유니세프가 개념을 제안했고, 유럽과 북미의 주요 임팩트 투자기관들이 관심을 보이며 관련 지표 개발과 사례 발굴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선 임팩트스퀘어가 이 흐름에 발맞춰 ‘아동’을 임팩트의 중심 축으로 삼았다. 많은 투자자들이 고령화 대응에 집중하며 시니어 시장을 주목하고 있지만, 이 시장은 소비 중심 구조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동은 시간이 흐르면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전환되는 존재다. 아동의 삶에 투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의 순환 구조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의 기반을 다지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임팩트스퀘어는 바로 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아동이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판단이다. 아동에게 투자하는 것은 미래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건강한 수요와 공급의 균형 속에서 지속 가능한 시장을 만드는, 임팩트와 수익의 교차점에 선 투자다. ◇ CLI, 아동을 바라보는 네 개의 창 CLI는 유니세프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아동의 생존, 발달, 보호, 참여를 기준으로 투자 전략을 세우는 방식이다. 유니세프는 여기에 ‘Child-Lens Metrics Bank’라는 자료를 더해, 총 150여 개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CLI가 낯선 이들에게 이 프레임은 너무 방대하다. 임팩트스퀘어는 이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을 재구성했다. CLI의 주요

[우리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며칠 전, 딸의 방을 정리하다 숙제 노트 한 구석에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 흔히 듣던 우리 속담이 영어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결국 좋은 친구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늘 곁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듯하다. 요즘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친구인가?” 최근 미국, 영국 등 주요 원조 공여국들이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잇달아 대폭 삭감했다. 미국은 국제개발처(USAID)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 중인 ODA 사업의 90%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2027년까지 원조 예산을 국내총소득(GNI)의 0.5%에서 0.3%로 줄인다고 밝혔는데, 이는 약 40%의 감축이며 줄어든 예산은 국방비를 증액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독일, 네덜란드도 10% 규모의 감축안을 내놨으며, 일본 역시 엔화 가치 하락으로 원조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예산 감소가 아니다. 지금까지 다자주의를 통해 쌓아온 국가 간 신뢰와 연대, 책임의 약속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충격은 국제보건 분야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 기후변화와 분쟁의 확산으로 감염병 위협은 커지고 있지만, 이를 대응하는 국제 보건 재정은 오히려 줄고 있다. 공여국들의 재원 축소로 인해 보건 시스템 강화와 백신 보급 등 주요 프로그램이 차질을 빚고 있으며, 국제기구들조차 사업 축소를 검토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드물게 ODA를 지속 확대하고 있는 국가다.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