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양육자라는 경험, 구글에선 스펙이다

금요일 11시. 샌프란시스코 구글 베이 뷰의 주차장. 우주 정거장을 연상케 하는 건물의 입구를 찾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구글의 향후 로드맵을 관장하는 인공지능(AI) UX 리서치의 정수진 파트장을 만나 ‘Guest visit’ 절차를 밟는 과정은 출국 수속과 비슷했다. 국제공항을 방불케 하는 메인 홀을 지나 카페테리아로 향한 우리는 세 자매의 비밀 레시피라는 재밌는 이름의 수프를 가득 퍼담았다. 벙거지를 쓰고 골든 리트리버를 산책시키는 직원, 유모차를 탄 영아부터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백발의 어른까지 삼대가 모여 식사 중인 그룹 사이에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공간마다 예술 경험을 전담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작품을 두리번거리며 인터뷰 장소로 가는 길엔 헨젤과 그레텔이 떠올랐다. 빵 부스러기라도 흘려 두어야 겨우 출구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과 삶의 균형을 얘기할 때 과연 이 둘을 완벽히 분리할 수 있을까. 규격화된 업무 환경에서 창의성은 떨어지고 생산성은 올라간다.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공간에서 업무 효율이 올라가는 건 열린 공간이 사고를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 으리번쩍한 건물은 관상용 로비가 아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발상의 정거장이다. 10년 후 구글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야 하는 이들이 규격화된 공간에 갇혀있는 건 해롭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한다. 본인의 일은 스스로 주도해서 만들어 가야 한다. 주니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리더로서 조언은 아끼지 않고 우선순위를 조율하되 어떤 일을 할 건지 관여하지 않는다. 누가 몇 시에 어디서 일하는지 개의치 않는다. 휴가 중에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대기업은 왜 사회문제 해결하는 비즈니스를 하지 않을까?

전국 24만대 넘는 택시 중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택시는 단 2대뿐이다. 대신 승합차를 개조해 리프트를 단 장애인 콜택시를 타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특별교통수단이다. 휠체어 이용자인 친구와 저녁을 먹고 택시를 부르면 일반 택시는 금방 오지만, 장애인 콜택시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사회적 기업인 코액터스는 영국의 블랙캡(Black cab) 택시를 2대 수입했다. 블랙 캡은 휠체어를 탄 채 옆문으로 들어갈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외관도 예쁘지만 이러한 유니버설 디자인 덕분에 런던의 명물이 됐다. 코액터스는 청각장애인이 운전하는 ‘고요한M’이라는 모빌리티 서비스를 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코액터스의 이러한 도전은 장애인 콜택시를 늘리는 방향으로만 달려온 한국에 “아예 택시의 모델 자체를 바꾸면 되지 않을까”라는 메시지를 던져줬다. 왜 현대자동차 등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택시 모델을 개발하지 않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보면 고령화로 인해 휠체어 이용자가 늘고 있는데 말이다. GM은 접근성센터(Accessibility Centre of Excellence)를 설치한 뒤 장애물 제로(zero barriers)를 위한 차량 개발을 하고 있다. 의수나 의족,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 청력이나 시력이 제한된 사람을 위한 자동차를 개발한다. GM은 자동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자고 한다. 포용적인 비즈니스 모델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먹거리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일본의 토요타도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이른바 ‘Japan Taxi’를 상용화했다. 청각 또는 시각장애인도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하라는 소송에서는 일본 엡손(Epson)이 개발한 스마트 안경으로 시연했다. 이 안경을 쓰면 한국어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 자막과 수어 영상을 선택해 볼 수

신수정 KT엔터프라이즈 부문장
[완벽한 리더 삽니다] 잘될 때 조심하라​

한 대형 제조사의 임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지난 수년간 너무 수주가 잘됐다. 모든 인력이 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바빴다. 다른 걸 고민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열심히 생산해서 팔고 돈을 벌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 버는 기쁨에 그리고 제품을 만드는데 바빠 막상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제야 신기술 적용이나 디지털전환 등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헌재 전 부총리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한국의 산업에 대해 유사한 진단을 하셨다. “시장수요가 너무 빨리 우리에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생산에 바빴다. 이러다 보니 하나씩 도전을 받으면서 문제를 풀어온 경제가 아니고 그냥 점프업한 경제가 됐다. 중간단계 고민의 과정이 없었다. 이것이 그 당시는 성공적이었는데 전환기의 끝에 오니 부담이 돼버렸다.” 현재가 너무 잘되면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시행착오를 통한 축적의 시간을 별로 갖기 어렵다. 기본적인 시간과 고난, 장애, 허들과 고통도 있어야 시행착오를 통해 실력과 역량이 축적된다. 그런데 너무 잘되면 그걸 쌓을 시간이 없다. 생산과 판매에만 집중하고 기본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다. 둘째, 현재의 수요 공급에 매몰돼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 잘될 때 별도의 조직을 꾸려 차근히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고 신기술 투자도 크게 해야 하는데 모든 조직이 현재 수요 대응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나빠질 때 그때 가서야 미래 대응을 부랴부랴 검토한다.  셋째,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라고 여긴다. 상황이 좋아서 잘되는 것을 자신의 실력이 좋아서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자만한다. 상승장에는 실력과 무관하게

김정빈 수퍼빈 대표
[쓰레기공장 이야기] 우리는 왜 항상 재활용에 실망하고 실패하는가?

지난 22일 서울시교육청에서 진행하는 교사 워크숍에 특강을 다녀왔습니다. 탄소중립 시범학교, 생태전환교육 연구학교, 탄소제로실천 선도학교의 담당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페트병 라벨을 제거하고, 재활용에 관련된 문제를 푸는 영상을 보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각 학교의 활동 결과를 공유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날 워크숍을 주관한 장학사는 탄소중립 시범학교와 생태전환교육 연구학교, 그리고 탄소제로실천 선도학교의 다른 점을 설명했습니다. 프로그램마다 목적과 성격은 달랐지만 결국은 지향점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속가능한 환경이나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교육이 현장에서는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많은 사람이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 넷제로(Net-Zero), 탄소저감(Carbon Negative), 기후긍정(Climate Postive)의 차이점을 정확히 모르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순환경제(Circular Economy), 전주기평가(Life Cycle Assessment) 등의 뜻도 잘 알지 못합니다. 환경이나 재활용 관련 개념이 언제부터 이렇게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을까요? 기점은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입니다. 이때부터 우리가 기존 방식대로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방식으로는 지구생태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존 생산 방식의 평가, 소비 방식에 대한 제재 그리고 이에 따른 온실가스의 발생량을 측정하고 관리하고자 하는 방법론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기후위기를 직면한 인류는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활용을 포함한 폐기의 단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없었지만 다음세대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제도들을 만드는 중입니다. 재활용 방식도 분리배출과 정부보조금 등의 방식을 벗어나 미래 산업에 맞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설계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활용으로 인한 탄소배출 감축량은 탄소배출권 형태로 자본시장과 연결되며, 순환자원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모금하는 사람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에는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씨가 떠오른다.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인데 연기와 영화예술에 대한 자긍심을 뜻하는 표현이다. 돈이 좀 부족해도 해야 할 일에 대한 목적과 사명이 분명하면 주눅 들지 말라는 뜻이니 비영리 업계 사람들이 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돈과 가오는 모금에 항상 등장하는 단어다. 돈을 언급하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리고 사람을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모금은 구걸이 아니라는 걸 애써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쪼그라드는 마음이 쉽게 펴지지 않는다. 주는 이나 받는 이나 모금은 쉽지 않다. 돈 없는 것은 괜찮지만 돈 달라고 하는 순간 가오도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돕는 일은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선, 또 하나는 투자다. 자선은 오늘의 결핍에 집중하고, 투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둘을 완벽하게 분리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관점은 사람들의 태도를 다르게 설정한다. 즉, 누군가의 오늘이 궁핍함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하는 기부가 있고, 조금만 더 도와주면 내일이 달라질 것을 기대해서 하는 기부가 있다. 이러한 기부자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이 빈곤 포르노와 타당한 모금 명분으로 갈라지게 된다. 대학에서 오래 모금하고 자선단체의 일로 넘어오면서 나는 이 두 가지 관점의 명백한 경계를 보았다. 대학에 희사되는 기부들은 오늘의 궁핍함의 해결이 목적이 아니었다. 늘 더 나은 미래와 밝은 희망의 이야기를 기부자들에게 전하고자 그 명분의 타당성과 투자의 가치를 준비했었다. 그 명분의 크기가 매우 큰 것이라서 고액의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행동주의 기업과 표면적 행동주의 기업

8년 전 이맘때쯤, 글로벌 자동차기업 폭스바겐의 디젤차량에서 기준치 40배가 넘는 오염물질이 배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임의로 조작된 프로그램에 의해 주행시험 중에만 오염 저감장치를 작동시켜 환경 기준을 충족하도록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처음에는 폭스바겐사 제품에서만 배기가스 조작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같은 그룹 산하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아우디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조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큰 파장이 일었다. 배신감을 느끼게 했던 것은, 당시 폭스바겐은 자사의 ‘클린 디젤’ 차량이 가솔린 자동차보다 ‘더 깨끗하고 친환경적’이라며 거액을 들여 슈퍼볼 광고, 온라인 소셜 미디어 캠페인, 지면 광고 등을 포함한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다국적 석유·가스 회사인 BP도 유사한 문제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BP는 ‘Beyond Petroleum(석유를 넘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지만, 여전히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투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워싱하는 기업으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뿐 아니라, 페이스북, 아마존 등도 여러 친환경 약속을 내놓았지만 이와는 상반된 행동을 보이며, 에너지 소비와 데이터 센터의 환경적 영향을 축소하지 않고 물류 및 창고 작업자들의 근로 조건과 환경 영향에 대한 개선을 하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지속가능경영과 ESG 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워싱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명품의 경우 가품, 일명 짝퉁이 더 많아지는 것처럼 ESG 경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가짜 ESG 경영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겉으로는 착한 척, 친환경적인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식량은 미래 성장산업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는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았다. 동유럽 곡창지대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 서민들은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았다. 중국에서는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양쯔강이 말랐고, 파키스탄에서는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올해는 슈퍼엘니뇨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다시 폭염과 가뭄, 연이은 산불로 시름이 깊어 간다. 서민들은 벌써 내년 식품 물가를 걱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나빴던 건 아니다. 식량 생산이 원활하지 못하면 더 호황인 업종도 있다. ABCD라는 별칭 또는 곡물 메이저로 불리는 ADM, 벙기(Bunge), 카길(Cargill), LDC가 그 주인공이다. ABCD 중 맏형 격인 카길은 지난해 매출액 1770억 달러로 최고를 갱신했다. 전년보다 120억 달러가 더 증가한 수치였다. 나머지 세 기업의 매출액도 전년 대비 평균 110억 달러 더 늘었다. 기후가 불규칙해져 농산물 생산에 차질이 커질수록 곡물 거래기업의 수익은 증가한다. 기상학자들은 내년을 더 걱정한다. 올해 폭염을 몰고 온 슈퍼엘니뇨가 내년에는 더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내년 이후의 식량 사정 역시 호전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그 이후는 더 나아질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두 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커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80% 이상의 곡물을 해외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국제 곡물 시장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외교·안보 분야 최정상급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는 “일본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된 국가 중 하나”라며 식량공급망의 취약성을 경고한다. 이것은 단순히 공급망의 문제에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소멸 위험 지역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되기 전에

저출생, 인구, 지방. ‘소멸’이라는 키워드에 비상등이 깜빡인다.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소멸 위험 지역은 과반이 넘는 118곳. 특단의 조치로 수백억원의 정부 지원금이 지역에 상륙 중이다.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유치하기 위한 지역별 각축전이 벌어지면서 외부 기획자를 수혈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연구용역에 참여하면서 나는 예비 정주 인구의 시선으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의 면면을 살펴봤다. 잠시 머무는 곳이라 해도 어떤 경험으로 기억될 것인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인구 유입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공간 조성. 시작점은 선명했다. 워케이션(workation) 부지를 변경해 아파트 단지를 올려달라는 요구를 기점으로 삐끗. 결국 최종 조감도는 논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빌딩 숲이 됐다. 얼기설기 얽힌 이해관계와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게 각색되는 동안 전문성과 차별성이 흐려지는 현상. 개점휴업 상태의 유령 건물로 남은 지역의 각종 지원센터와 공공기관 건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지역별 혁신도시를 비롯해 국공립대 역시 주말이 되면 공동화 현상에 처한다. 일하는 공간이자 임시거처에서 주말이면 문화를 향유하고 아이를 교육하는 수도권으로 돌아간다. 돈을 버는 곳과 쓰는 곳이 다르다 보니 그나마 있던 인프라마저 흔들린다. 폐업 사인이 즐비한 원도심 1층의 쇼윈도를 지날 때면 대낮에도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지방소멸대응기금 기한이 10년으로 설정되었다 해도 매년 평가에 의해 100개 지역으로 예산이 쪼개지는 현재의 방식이라면, 앞으로 논밭 위에 수백 개의 나홀로 빌딩이 올라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거미줄처럼 첨예한 지역의 이해관계, 공공기관의 기준에 맞춘 수백 장짜리 계획서와 입찰 조건, 성과 보고를 위한 결과물.

임성택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기업과 사회] 사회공헌을 넘어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

시스코는 지난 25년 동안 180여 나라에서 1만개 넘는 IT교육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무려 17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료로 교육받았다. 특히 저개발국가에 폭넓은 IT 기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 활동은 시스코가 진출하는 지역의 전문인력을 키워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영국의 유통업체 테스코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의외의 선택을 했다. 빈민가에 신선한 야채와 음식을 파는 매장을 연 것이다. 그동안 빈민가에는 패스트푸드 매장은 많지만 신선식품을 파는 마트는 없었다. ‘음식사막의 오아시스’라고 불린 이 매장들을 통해 테스코는 빈민 지역의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면서 비즈니스의 기회도 만들었다. 신선한 과일로 빈곤과 폭력을 몰아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는 기업의 사회공헌을 이야기하지만 외국에서는 지역사회 참여(Community Engagement)를 이야기한다. 번역하면 기업과 지역사회의 ‘관계 맺기’다. 지역사회는 기업과 어떤 관계일까? 기업이 지역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기업이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기업은 지역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사회공헌론’은 전통적이고 오래된 개념이다. 기업도 사회 안에 있으니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자선적이며 윤리적인 접근법이다. 솔직하게는 사회적 영향보다는 사업적 이익이 우선이다. 홍보나 마케팅의 목적이 크다. 기부금을 전달하거나 연탄을 나른 뒤 찍는 사진이 더 중요하다. 당연히 사회나 경제가 어려워지면 사회공헌은 축소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사회공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이다. 기업도 시민으로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의무’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사회공헌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혁신의 목격자] 10년을 돌아보니 보이는 세 가지 변화

한 달 간의 안식휴가를 다녀왔다. 대표가 된 지 10년만에 처음이었다. 10년 전 MYSC 매출은 2억2000만원을 간신히 넘겼고, 영업손실 3억원을 기록했다. 설립 이후 자본전액잠식을 경험하면서 영리법인을 폐업하고 비영리법인으로의 전환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매출 100억원을 넘어서며 투자 운용자산 600억원 이상, 130개 이상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 10년전 임팩트투자는 누적 4건이 고작이었다. 국내 최초의 사회혁신 전문 컨설팅·임팩트투자사를 표방했던 MYSC에게 당시는 무척이나 곤고한 시기였다. 사회혁신과 임팩트투자는 과연 언제 지속가능해질까란 질문은 그 당시 사치스러운 질문이었다. 한국에서 사회혁신과 임팩트투자는 과연 지속가능할까란 질문이 진실에 가까웠다. 안식휴가는 1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 다시 그 질문을 마주해볼 수 있는 여유였다. 그때로부터 지금은 어떤 부분이 달라졌을까? 크게 세 가지의 변화를 개인적으로 반추해봤다. 첫째, ‘임팩트’라는 영역이 경제계와 자본시장의 메인 스트림에 포함됐다. 과거에 ‘임팩트’는 영리와 비영리 사이에 있는 무언가, 또는 두 섹터의 융합이라는 관점만으로도 충돌되는 버거운 논의들이 지배했다. ‘MYSC는 비영리법인일 줄 알았다’고 말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1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소셜 벤처링’(social venturing)이란 2박 3일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다. 참가비만 1만 달러가 넘었지만 초대를 받아 참여한 이곳에서 나는 응당 ‘소셜’이란 단어를 보고 사회적기업가들 또는 대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모일 것으로 생각했다.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바클레이스, 비자, 마스터카드 등 다국적 대기업의 신사업 또는 혁심 담당임원들이었다. 이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 모태펀드에 ‘임팩트투자’ 출자 계획이 있는지 문의한 적이 있었다. 담당자는 짧게 회사

양경준 크립톤 대표
[로컬 패러다임] 청년 창업가 육성의 조건

지난해 6월 전국에서 일제히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거의 모든 지역의 후보자들이 ‘청년 창업 지원’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역경제 활성화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까. 과거에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공약으로 대기업 유치를 약속했다. 지금은 이런 공약이 먹히지 않는다. 수도권 규제 완화로 대기업이 수도권으로 이전하고 임금 인상과 강화된 노동법 때문에 지방에 있던 공장이 폐쇄되거나 해외로 이전하는 추세를 막을 수 없다. 현실 인식이 부족한 일부 정치인들을 제외하고 이 정도는 이미 학습됐다. 그다음으로는 산업단지 조성 공약이 유행했다. 그러나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진 지방산업단지 중 성공 사례가 거의 없다는 것 역시 이미 학습이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카드가 청년 창업 육성이 됐다. 이 카드는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다. 스타트업이 창출하는 일자리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지역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의 주체는 이제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스타트업이 됐다. 문제는 지역 창업을 활성화하거나 스타트업을 지역에 유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창업과 취업의 기회를 찾아 지역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스타트업얼라이언스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이후 지금까지 10억원 이상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중 90%가 수도권에 밀집해 있다. 수도권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익숙해진 창업가들을 어떻게 지역으로 끌어내린다는 말인가. 해법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변화는 서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 최초의 창업 붐이 일었을 때부터 스타트업은 투자사들이 자리 잡은 강남 테헤란로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유미 포포포 대표
[기차에서 일합니다] 멘토와 선무당, 그 균열과 균형 사이

“점을 AS 받는다고요?” 저녁을 먹으러 가던 택시 안에서 선배는 잠깐 점집에 들르자고 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점을 보라는 호객행위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내 생시(生時)를 풀던 역술가는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를 하면 대성할 팔자라 호언장담했다. 난생처음 삥을 이렇게 뜯기는구나 허무한 쓰나미가 스멀스멀 몰려왔다. 드로잉은커녕 내가 쓴 글씨도 못 알아보는 천하제일 악필이 디자이너라니요. 그것도 웨딩? 창업한 이래 이런 선무당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시니어 인턴 지원 사업으로 모신 선생님은 어느 주말 내비게이션도 길을 잃는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전원주택으로 나를 불렀다. 여기서 집을 짓고 산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텃세가 심하다는 정착기가 1절. 앞으로 농업이 유망하니 여기 들어와 농사를 지으라는 충고가 2절. 지역에서 자리 잡으려면 일자리 지원금을 받아 “날 고용하세요!”라는 3절에 들고 간 샤인머스캣 보따리를 풀던 손이 머쓱해졌다.  현장 실사를 겸해 사무실에 찾아온 한 컨설턴트는 두 시간 동안 딸 자랑만 늘어놓았다. “정 대표가 딸 같아서”라는 코멘트에 코털까지 쭈뼛 소름이 돋아 재채기를 쏟으며 서둘러 배웅했다. 처음 정부 지원사업을 통해 배정된 멘토는 초면에 “이거 진짜 할 거예요?” 물으며 다리를 삐딱하게 꼬았다. 덕분에 내가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심혈을 기울여 몇 달 만에 만든 시제품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어떤 심사위원은 “애 엄마가 운동화 질끈 묶고 달릴 생각을 해야지. 또각거리면서 하이힐 신고 다니는 꼴인데?”라며 코웃음 쳤다.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는 역량을 보여드리려 몇 달을 밤새워 만들었다”며 애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