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기업으로서 도움되고 싶었죠”

윤병호 부사장 인간문화재는 기업 사회공헌 활동의 보편적인 대상자는 아니다. 한독약품과 문화재청, 전국 11개 의료기관이 함께 진행하는 협력 의료봉사 모델도 새롭다. 지난 21일, 한독약품 윤병호(60·사진) 부사장을 통해 ‘인간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을 펼친 의미와 계획을 들었다. ―왜 인간문화재인가. “인간문화재는 나라의 살아있는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문화재의 평균 연령이 69.3세로 고령이기도 하고, 130만원의 정부지원금은 전승 유지에 쓰기에도 부족하더라. 건강관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건강을 책임지는 기업이니, 인간문화재들이 전수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해 드리자고 생각했다. 제약회사로서 가지는 기업의 비전과 사회공헌 활동의 방향도 잘 맞았다.” ―캠페인 비용을 ‘매칭그랜트(Matching Grant)’ 방식으로 마련한다는데…. “직원들이 자신의 급여 중 일부를 기부하고, 회사에서 동일 금액을 기부한다. 2009년, 처음 ‘인간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을 시작할 때, 직원들에게 이 활동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했다. 이에 공감한 직원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행사를 지속적으로 열었던 것도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주효했던 것 같다. 매월 5월이면 가족을 초청하는 ‘패밀리투어’ 행사를 여는데, 인간문화재에게 강강술래를 배우는 시간도 갖기도 했다. 지난 15일 열린 ‘조선왕조 궁중음식 만들기’ 행사에 임직원들도 참여하도록 독려했는데 이도 같은 이유다.” ―지난 3년 동안 ‘인간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지난 6월이었다. 충북 음성지역 다문화 가정 120여명을 한독의약박물관에 초청해 ‘남사당놀이’를 보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과연 우리 전통 공연을 좋아할까’ 의문이 있었다. 북과 꽹과리 소리가 울리자, 다문화 가정 부모와 아이들,

인간문화재 지원으로 전통문화 관심 키운다

한독약품 ‘인간문화재 지킴이’ 캠페인 직원들 기부하는 급여에 회사가 같은 금액 지원하는 ‘매칭그랜트’ 방식 도입해 인간문화재 건강 관리 총 70여 명 대상으로 2년마다 무료 건강검진 2010년부터 나눔 공연 인간문화재에 공연 기회 초청받은 소외계층에게는 문화 접하는 계기 마련 “조선시대엔 집에 손님이 오면 ‘활 쏘러 갑시다’란 말을 꼭 했지. 요즘 말로 하자면 ‘차 한잔 합시다’란 뜻이야. 그만큼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어.” 유영기(75)씨는 전통 활과 화살을 만드는 ‘궁시장(弓矢匠)’이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돼 인간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3대째 전통 공예를 이어온 유씨지만, 아들 유세현(49)씨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활을 만들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반갑지 않았다. 돈 벌기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이다. 유씨는 “몇 천원짜리 카본활이 들어오면서 가격 경쟁에서 밀려 전통활 시장이 죽어버렸다”며 “물소뿔이 주재료인 각궁은 화살 가격을 빼더라도 70만~80만원이라 찾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올해에도 개인 주문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유씨는 요즘 활쏘기 체험 행사에 납품을 하거나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집궁시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린다. 유씨와 같은 인간문화재는 전국 180여명. 지난 9월 말 문화재청에서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요무형문화재 128개 종목 가운데 20개가 전수조교가 없는 상태다. 거문고산조, 제주민요, 명주 짜기 등 7개 종목은 중요무형문화재이지만 보유자조차 없다. ◇사각지대를 찾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지난 13일 오전, 유씨는 오랜만에 박물관이 아닌 병원을 찾았다. 건강검진을 위해 세브란스병원 건강증진센터를 방문한 것이다. “자, 이 호스를 입에 대고 후우 부시면 됩니다.” 간호사의 말에 유씨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초반에 실력 검증받으려면 어쩔 수 없어… 외부투자 받을 곳 없는 것도 문제”

사회적기업가들의 고충 – 객관적 평가는 필요한데 활동만으로는 시간 걸려 단시간에 성과 나오는 공모전에 매달리게 돼… 사업마다 내용 다르니 중복이라고 보기 힘들어 “정말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청년 사회적기업가들 내부에서도 논의가 많고요. 대회 준비하는 데 시간도 많이 들어요. 공모전이 한번 끝나고 나면, 한 달 동안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아요.” 서현주(32) ‘삼분의이’ 대표는 “그럼에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시 예비 사회적기업 ‘삼분의이’는 자폐아동을 대상으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2009년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청년창업사업에 선정되면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비영리사업은 창업멘토링이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 856개 팀 중 비영리사업은 ‘삼분의이’ 단 1개였던 것. 서대표는 이후 한 NGO에서 운영하는 사회적기업가 대상 경영교육 프로그램에 신청했지만 내부 사정상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참여자가 아니었기에, 인큐베이팅 기회도 없었다. 서 대표는 “사업 3년차에 접어들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네트워크 확장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받은 상금은 자폐 아동 대상 교육비, 미술 수업 재료비, 자원봉사자 활동비 등으로 사용했다. “교육비를 받으면 수익이 나지 않느냐”는 질문에 “현재 제공하는 미술 교육 프로그램은 시범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학교에 무료로 제공한다”고 말했다. ‘공모사업에 지원한 내용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중복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다. 미디어 사회적기업 ‘베네핏’의 조재호(26) 대표는 “영상제작, 잡지발행, CSR 마케팅으로 나눠 따로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를 각각 3개의 공모사업에 지원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300만원의 수익도 못 냈던 사업 초반에는 마케팅 비용도

집 고쳐주며 태풍 피해당한 분들 마음까지 위로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_최영진씨 “처음 봉사활동을 할 땐, 아침 9시에 모여 도배를 시작하면 밤 10시에 끝났어요. 지금은 5~6시면 모든 작업을 완료합니다. 지난번에 고향집에 가서는 부모님 방 도배도 제가 해드렸어요(웃음).” ‘이제 도배라면 자신 있다’는 최영진(23)씨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봉사자다. 인하대학교 ‘트인’ 봉사 동아리 회장이기도 하다. 2009년부터 여수, 정읍, 청도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피해지역 복구활동에 참여했다. 3년간 총 538시간을 봉사한 최씨는 지난 22일, 희망브리지 봉사의 날 최우수상을 받았다. 지난 8월, 최씨는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400㎜가 넘는 집중호우의 피해를 입은 전북 군산에서 2박3일 동안 세탁봉사에 참여했다. 파주 물류창고를 방문해 구호현장에 보낼 생필품 세트를 2000세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주거환경이 열악한 인천지역 가정을 방문해 도배 봉사도 한다. 남구청, 부평구청 등 구청에서 봉사자 요청이 오면, 대상자를 방문해 집 상태를 확인하고 도면을 그린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아침부터 동아리원들은 10명씩 팀을 이뤄 도배를 진행한다. 도배지나 장판은 희망브리지에서 지원을 받고, 풀·실리콘 등의 자재는 학생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마련한다. 그가 이런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TV나 신문을 보면 본인도 살기 힘든데 남을 도와드리는 분들 있잖아요. 길거리에서 김밥 판 돈으로 기부를 하는 할머니처럼요. 그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에 죄책감이 있었어요. 전 편안하게 사는 거였으니깐요. 무거운 마음을 벗어보고자 봉사동아리에 들어가긴 했어요. 막상 시작하니, 힘이 들기도 했습니다. 근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면 다시 힘이 나요. 친구들에게 권유도 하게 되고요. 도배 봉사는 취업하고 나서도 계속 꼭 하고

장기기증, 어려운 일 아닌 당연한 문화 되어야죠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_신채영씨 “17년 전, 건강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위암이 아닐까 했는데, 다행히 위염이었어요. 정말 큰 병을 얻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했습니다.” 신채영(80)씨는 건강할 때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후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한 달에 5000원이라는 금액 후원에도 참여했다. 지난 2011년부터 1만원으로 늘렸고, 내년부터는 2만원으로 늘릴 예정이다. 고령에 수입도 일정하지 않지만, 한 번도 후원을 빼먹은 적이 없다. 금액 후원자 3만3000여명 중 둘째로 오랜 기간 동안 후원을 해왔다. 사실 신씨는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한 이후 눈에 띄게 몸이 건강해졌다. 이어 “다른 사람을 돕기로 정했더니 오히려 내게 좋은 일이 생겼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쩜 그 나이에 주름살도 없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바깥양반 도장을 몰래 훔쳐서 후원 신청서를 썼어요. 이후에 들키고는 아주 혼이 났습니다. 근데 제가 더 건강해졌으니 아무 소리 말라고 그랬지요. 우리 집 양반도 어쩔 수 없었죠.” 처음에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고 말하면 지인들은 깜짝 놀라곤 했다. 모두들 낯설어하고 꺼려하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도 변하면서 주위 사람들 중에서도 “나도 장기기증 서약을 하겠다”는 이들도 생겨났다. 남편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남편은 3년 전, 세상을 갑작스레 떠나면서,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신씨는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가버린 이들이 많다”며 “장기기증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웃에게 보금자리 선물하며… 서로 같은 꿈 키워가요

2012 NGO가 뽑은 올해 최고의 후원자_해비타트 최린·최완 형제 형 최린 – 올해 건축학과 입학해 봉사하며 20대 보낼 것 건축현장 남는 자재 활용… 물건 팔아 재난지역 기부 동생 최완 – 형 이어 봉사동아리 회장… 용돈 아껴 재료비 마련해 어린이용 탁자 제작… 내가 흘린 땀만큼 감동 줘 “가난한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집을 지어주고 싶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에겐 방음이 잘되는 집을, 텃밭을 가꾸고 싶은 이들에겐 마당이 있는 집을요.” 최린(19·사진 왼쪽)군은 올해 서울시립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미국 남부 극빈촌인 앨라배마주 헤일카운티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무엘 막비’와 같은 건축가가 되는 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최린군의 동생 최완(17·서울고2·사진 오른쪽)군의 꿈도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건축물을 짓는 건축가다. 두 형제가 같은 꿈을 꾸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2008년 여름, 최린군은 처음 해비타트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아버지 회사의 해비타트 봉사 프로그램을 소개받아 가족과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최린군은 이후 4년간 천안, 군산, 양평, 안양, 울릉도를 돌면서 총 500시간가량의 건축봉사에 참여했다. “물집이 잡힐 정도로 힘든 일정이었지만 얻어가는 것이 많았어요. 대학생 형, 누나들과 이야기하면서 미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도 있었고요. 봉사하는 삶으로 20대를 보낸 사람들이 만날 공부만 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어요.” 최린군은 모교인 서울고 내에 해비타트 봉사동아리 ‘서울인액션(Seoul In Action·이하 시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청소년이 해비타트 봉사를 하면 부모님이 동행해야 하는 등 제약조건이 많은데, 동아리를 만들면 단체로

스무 명의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제가 엄마랍니다

플랜코리아 김수미씨 김수미(34)씨는 올해 4월부터, 플랜코리아를 통해 무려 20명의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왜 20명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아직 전 미혼이지만, 이후 출산과 육아 기간이 있을 거잖아요. 그때의 수입을 최하수준으로 가정하고 지금의 수입과 평균을 내봤어요. 그리고 꾸준히 결연할 수 있는 인원이 몇 명쯤 되는지 계산해봤습니다. 아동과 결연하는 것은 멈추게 되면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시작할 때 스무 살까지는 책임진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김씨의 목표는 수입의 3분의 1을 나눔을 위해 쓰는 것이다. 아직 초기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점점 늘려나갈 계획이다. 김씨에게 이와 같은 인생 계획을 세운 이유를 물었다. “직장생활 한 지 10년 정도 되었는데, 엄마 집도 사드리고…. 꿈꿨던 것들을 대부분 이뤘더라고요. 어릴 때 어렵게 자랐는데, 여기저기서 도움받았던 분들 생각이 났어요.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던 바를 지금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씨의 서재에는 20명의 아이 사진이 걸려 있다. 그녀는 중국 후원아동인 왕(7)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받았던 때를 회상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라 잊지 못한다”며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말에 왜 그렇게 기뻤는지 모르겠다”고 당시의 기분을 전했다. 왕군을 비롯한 20명 아이의 순수함과 따뜻함이 담긴 편지는 김씨에게 에너지원이다. 김씨는 “전에는 삶에 대한 허무감을 많이 느꼈는데 후원자가 되면서 하루하루가 더 의미 있다”며 “20명을 돕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게 되면서 순간순간이 값지게 느껴진다”고 소감을 말했다.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은 항상

나눔은 액션, 실천하는 용기가 중요해요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 이상민씨 올해 후원자 100명 모아 활발한 후원 커뮤니티로 많은 후원자와 교류 막연한 생각만 하기보다 활동하는 곳에 발 들이면 봉사의 기쁨 느낄 수 있어 “영상 속 아이의 슬픈 모습을 보고 감성에 젖어 한 번 후원을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책임질 수 있는 후원자 100명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상민(33)씨는 올해 목표로 삼았던 ‘100명의 후원자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결속력을 가진 단단한 그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명 ‘컨티뉴(Continue) 그룹’이다. 80명의 후원자는 직접 아는 지인들이고, 나머지 20명은 지인이 소개한 사람들이다. 이씨는 각각의 이메일, 그룹 가입일, 누구의 소개로 만났는지, 언제 메일을 보냈는지 등의 항목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매번 체크한다. 그는 “컴패션 콘서트가 있거나, 후원모임이 있으면 문자를 보내거나 수시로 안부를 묻는다”며 “후원하는 어린이가 편지를 보내면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주기도 한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씨에게 “후원자가 한 명 더 생길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느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는 ‘마음이 움직이는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믿고 어떤 반응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다. 처음엔 핀잔을 주던 친구들이 지금은 오히려 열혈 후원자가 돼서 다른 후원자를 만들기도 한다. “제 여동생이 대표적이에요. NGO 자체를 싫어하고, 제가 하는 일도 싫어했죠. 어느 날, 컴패션 콘서트가 있기에 초청했더니, ‘연예인 볼 수 있느냐’며 오더라고요. 이때를 계기로 컴패션 후원자가 되었고, 지금은 재능 기부도 하면서 얼마나 바뀌었는지 몰라요(웃음).” 이씨가 열정적으로 나눔에 동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벤트·공연 전문

길고 복잡한 절차… 입양 전담 판사 필요해

‘특례법’ 실시 후 인천지역 첫 사례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보셨죠? 닭이 청둥오리를 키우잖아요. 애들한테 그런 식으로 입양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요.” 인천에 사는 유진아(가명·35)씨는 지난달 16일, 5개월 된 미진(가명)양을 입양했다. 지난 8월 5일 ‘입양특례법’이 실시된 후 인천에서 입양 허가를 받은 첫 사례다. 개정 입양특례법에 따르면, 입양을 원하는 양부모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난 4월 입양을 신청한 유씨는 “길고도 힘들었다”고 입양 과정을 설명했다. 개정 입양특례법에 따라, 유씨는 주민등록등본, 소득 및 재산 관계 서류 등 기본 서류 외에 범죄경력 조회 회신서, 심리검사 결과서, 알코올·마약 등 약물중독 관련 서류를 가정법원에 추가 제출해야 했다. “입양될 아이를 위한 법이라곤 하지만 절차가 매우 복잡해요. 법이 시행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관련 기관의 이해와 협조가 부족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유씨는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취지에 맞게 정착하려면, 가정법원의 입양 전담 판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가사 조사 끝나고 판사님 만나는 데 한 달 걸렸어요. 판사님 재판 일정이 빡빡해서요.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빨리 부모와 만나야 애착 관계가 생겨요. 입양을 담당하는 전담 판사가 없다 보니, 가정법원에서 이혼을 주로 담당했던 판사분들이 허가를 내려요. 아이를 위한 입양이니만큼 세밀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씨는 지난 4월부터 한국입양홍보회 인천 지부 등 입양 가족 모임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아이가 입양 사실을 받아들일지 제일 두려워요. 준비하려고 공부하는 거예요. 공개 입양 가정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배워요. 입양 사실을 숨겼다가 아이가 나중에 받는

‘지역개발사업’으로 인프라도 삶도 한층 UP

WFP 네팔 사무소 니콜라 오벨린 부소장 ‘FFNV 사업’ 시행 3년 ‘혼자서도 잘해요’ 아닌 마을 사람들 전체 삶의 질 높이는데 도움 한국 ‘새마을운동’ 보며 발전 철학에 강한 인상… 빈곤 이겨낸 한국에 네팔도 많은 희망 얻어 1961년 설립된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이하 WFP)은 지난해 전 세계 식량 구호 활동의 54%를 진행한 유엔 산하 국제기구다. WFP의 지원을 받은 영양실조 어린이만 1100만명이다. WFP는 2011년부터 3년 동안 한국 정부(코이카)·굿네이버스와 함께 네팔 도티지역에서 ‘푸드 포 뉴 빌리지(Food for New Village·이하 FFNV) 사업’을 펼치고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1년, WFP 네팔 사무소 니콜라 오벨린(Nicolas Oberlin) 부소장을 만나 이번 사업의 의미를 들어봤다. -‘FFNV 사업’이 3년 동안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는데, 지난 1년을 평가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네팔 중서부 100만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직업(공공근로사업)을 주고, 그 노동의 대가로 음식이나 돈을 제공해왔다. 일명 ‘푸드 포 워크(Food for Work)’나 ‘캐시 포 워크(Cash for Work)’ ‘캐시 포 애셋(Cash for Asset)’ 등이었다. 하지만 FFNV 사업은 좀 특별하다. 단순히 지원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을을 발전시키고 아이들 교육에 힘을 쏟는다. ‘혼자서도 잘해요’ 방법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전체 삶의 질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농업 생산성 증가, 교육 발전, 인프라 구축, 위생 교육 등 확실한 목표가 있다. 음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변화다. 이 사업은 멀리 내다보고 도와주는 방식이다.” -왜 사업 파트너로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네이버스

[날아라 희망아] 따뜻한 옷 한 벌이 필요한… 열한 살 키나를 도와주세요

잿빛 바닥엔 찬 기운이 올라옵니다. 키나(11)네 가족이 사는 2평짜리 쪽방입니다. 방에 들어가기 위해선 허리를 구부려야 합니다. 불빛이 없는 방, 깜깜한 어둠뿐입니다. 겨우 어둠에 익숙해지자, 5개의 약병이 눈에 들어옵니다. 키나 부모님이 먹는 약입니다. 옷가지들은 방구석에 어지럽게 쌓여 있고, 그 옆으로 그릇과 주전자, 맷돌이 보입니다. 식량을 담은 포대자루도 구석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쪽방은 네 식구의 침실이자 주방이고, 창고입니다. 키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합니다. 매일 아침 책가방을 지고 집을 나설 때면, 신이 나서 마음이 급해집니다. “어떤 과목이 제일 재밌니?” 키나는 쪼르르 달려가더니 수학책을 가져옵니다. 키나는 쑥스러운 듯 수학책을 이리저리 펼치며 말했습니다. “간호사가 되서 엄마와 아빠처럼 아픈 사람을 돕고 싶어요.” 키나의 부모님은 에이즈 환자입니다. 아버지 차니(42)씨는 20년 전, 일자리를 찾아 가난한 네팔을 떠났습니다. 홀로 인도에서 호텔 경비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고향인 네팔 도티지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둘라(40)씨도 에이즈 환자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병든 후, 키나의 삶은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몸에 힘도 없고, 두통에도 시달립니다. 이웃 어른들처럼 공공근로사업에도 참여하지 못합니다. 텃밭 농사를 짓고, 가축을 돌보는 일이 전부입니다. 하는 수 없이 오빠 나벌(17)이 나섰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지만, 이마저도 실패해 지난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장 네 식구는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가 버겁습니다. 친척들이 도와주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갑니다. 차니씨는 “몸이 조금 좋아지면, 돌 나르는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고

[Cover Story] 지속가능한 개발, 변화의 현장③ 일자리 생기고 소득 늘어… 활기 되찾은 마을에 주민들 ‘활짝’

지속가능한 개발, 변화의 현장③ 네팔 ‘푸드 포 뉴 빌리지’ 사업 네팔 도티지역 오지마을 1년 내내 농사 짓지만 기술도 물도 부족해 식량 겨우 3개월치 생산 한국 새마을운동 닮은 ‘FFNV’ 2011년 시작 주민 조직 참여시켜 공공근로사업 운영 마을 시설 개선으로 생산성 향상 도모하고 참여 주민에 수당 지급 부모가 여유 생기자 아이들 학교에서 공부 배움이 바꿀 미래 기대 “탕, 탕!” 도끼가 하늘로 솟구쳤다. 은색 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열 번 넘게 이어지자 바위가 ‘쩍’ 갈라졌다. 지난달 19일, 네팔에서 만난 산드르 바하드라(52)씨는 바위를 깨고 있었다. 이곳은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36시간 걸리는, 해발 1500m 오지인 도티(Doti)지역 라다가다 마을. 그는 “계곡물을 끌어와 2㎞쯤 떨어진 우리 마을에서 쓸 관개수로를 만들고 있다”며 “비가 오면 길이 뒤엉켜 버리는데, 약한 지반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이런 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바위를 깨 돌을 만들면, 여자들은 20분 동안 산길을 오르내리며 7~8㎏ 무게의 돌을 옮긴다. 마을 입구에서 30여분 걸어들어가자, 돌을 쌓아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저수탱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건기(乾期)에 대비해 물을 저장해놓는 곳이다. 3400ℓ가 담길 만큼 큼지막했다. 식수원인 계곡에서 저수탱크까지 이어지는 1.5㎞짜리 파이프라인은 이미 완공돼 있었다. 여기에서 마을 식수대(우물)까지 이어지는 1개뿐이던 수로도 4개로 늘렸다. 11일 동안 92가구가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저장탱크가 완성되면 550명 정도가 먹고 씻을 물을 쓸 수 있어요. 가뭄이 극심한 시기에도, 저장된 물을 농업용수로 쓸 수도 있고요. 농사도 잘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