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방] 느슨하게 위대하게

  연말이 다가오면 슬슬 압박이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내년 공익 분야 트렌드와 전망을 짚어달라는 요청들이 밀려든다. 제3섹터 트렌드, 기부·모금 전망, CSR 트렌드 등을 분석해 발표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게 오늘 자 신문에 게재한 ‘기업 사회공헌 전망’이다. 내년에 기업들이 사회공헌 예산을 얼마나 쓸 것이며 어떤 종류의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 대략적인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매출 상위 1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순탄치 않다. 서로가 하나의 ‘표’ 안에 나란히 담겨 비교되는 걸 기업들이 매우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 더나은미래가 주최한 ‘CSR커넥트포럼’은 국내 사회공헌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표 안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기업들을 한 무대에 세운 것이다. ‘아동·청소년’을 주제로 사회공헌을 하고 있는 5개 기업을 모아 포럼을 열었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기업들이 이렇게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삼성디스플레이, GS칼텍스, CJ문화재단, 현대자동차그룹, 한국타이어나눔재단 담당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공통의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벌이고, 끝나면 각자의 자리로 쿨하게 흩어지는 ‘느슨한 연대’가 확산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 ‘플라스틱 제로 운동’을 펼치거나, 비영리 단체들이 아동학대나 동물권 등 특정 주제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연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지만, 기업마다 색이 다르고 업종과 규모가 다르다 보니 진전이 잘 안 됐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좋은

나를 ‘바른 투자’로 이끈 건 노력 없이 물려받은 富에 대한 책임감

[Cover Story] 홍콩 ‘RS그룹’ 설립자 애니 첸 회장 인터뷰 10년 전 ‘RS그룹’ 설립… 100% 임팩트투자 전념해 ‘나쁜 투자’가 부른 재앙, ‘바른 투자’로 해결하고파 부자들이 집안의 돈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자산운용회사를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라고 부른다.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가 1882년 ‘록펠러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하면서 생겨난 용어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개별 패밀리오피스들이 굴리는 자산의 규모는 최소 500억~1000억원. 많게는 조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혔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다. 애니 첸(Annie Chen)은 홍콩에 본사를 둔 패밀리오피스 ‘RS그룹’의 회장이자 설립자다. 2009년 개인 재산으로 회사를 차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100% 임팩트투자(Impact investing)로 자산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환경이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펀드나 기업에만 돈을 투자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1~22일 임팩트투자 포럼인 ‘2019 아시아임팩트나이츠’가 제주에서 개최됐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첸 회장을 만났다. 그는 RS그룹을 설립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富)의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나의 부는 과연 내 것일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써야 할까? 부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일종의 죄의식이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임팩트투자에 눈 떠 ―’죄의식’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죄의식이라고 해도 되고 책임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내가 노력해서 창출한 부가 아니라 부모님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있었다.” ―그래서 RS그룹을 만들었다? “원래는 가족이 함께 하나의 패밀리오피스를 운영했는데 2007년 자산을 분할하면서 각자 돈을 관리하게 됐다. 큰돈을

“성장하는 사회적경제… 한국 소셜벤처에 세계가 주목”

SEWF 유일 아시아인 이사 김재구 교수 인터뷰 2008년 영국서 시작된 ‘사회적기업 월드포럼’ 올해 행사 최초로 개도국 아프리카에서 개최 경제 분야에서도 ‘분배’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 내년 한국 사회적기업을 스피커로 내세울 것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이 ‘빈곤’을 연구한 개발경제학자 3인에게 돌아갔다. 매사추세츠공대의 에스테르 뒤플로 교수를 비롯한 수상자들은 15년간 40여 개 저개발국 현장을 누비며 빈곤 문제의 해법을 연구했다. 그간 빈곤 퇴치를 위해 선진국들이 해왔던 국제개발협력 사업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지, 경제학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해 대안을 제시했다. 지난달 23~25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2019 사회적기업 월드포럼(Social Enterprise World Forum·이하 ‘SEWF’)’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갔다. 72개국 1500여 명이 참석한 이 포럼의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아프리카’, ‘국제개발협력’, 그리고 ‘사회적경제’. 지난 1일 만난 김재구(55)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아프리카 빈민층의 삶을 개선하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사회적경제가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8인으로 구성된 SEWF 이사회의 유일한 아시아인이다. “노벨위원회는 지금까지 주로 ‘성장’을 연구한 경제학자들에게 상을 줬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분배’를 연구한 학자들에게 준 겁니다. 성장이 아닌 분배를 위한 고민, 기울어진 운동장을 똑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박수 받는 시대가 됐어요. 그 중심에 ‘사회적기업가’들이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혁신가들이죠.” SEWF는 사회적기업 생태계를 확장하고 사회적기업가들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마련된 국제 포럼이다. 영국,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등 사회적경제가 발달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이사회가 꾸려져

[진실의 방] 잊을 수 없는 아이

잊을 수 없는 아이가 있다. 만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아이지만, 가끔 그 아이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초여름 날씨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패딩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 나이는 대여섯 살쯤. 모임에서 만난 A의 표정이 심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해 초였다. 그러니까 1월쯤. A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모녀를 만났다. 같은 아파트 사람은 아닌 듯해 가볍게 목례만 하고 서 있었는데 우연히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됐다. 상처도 있었고 멍이 심하게 들어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 엄마에게 “애기가 다쳤나 봐요”라고 했단다. 아이 엄마는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대답하고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냈다. 애가 야단스러워서 키우기 어렵다, 얘 때문에 사는 게 너무 힘들다, 바로 옆에서 아이가 듣고 있는데도 큰 소리로 떠들었다. A는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오지랖인 것 같기도 해서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모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A는 모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전보다 멍이 더 심하게 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 날씨였는데 아이는 롱패딩을 입고 있었다. 반팔을 입어도 땀이 나는데 롱패딩이라니. 아이의 몸에 난 상처를 가리기 위해 그런 옷을 입힌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A는 엄마에게 인사를 건넨 뒤 “아이가 또 다쳤나 보네요. 혹시 이 아파트 사세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아이 엄마가 돌변했다. 당신이

모래바람 덮친 그 땅에 어떻게 숲이 생겨났을까?

[Cover Story] 사막화로 터전 잃은 몽골 유목민 자립기 기후변화로 가축 잃은 유목민, 초원서 밀려나 ‘도시 빈민’ 전락 조림 사업 10년 ‘바양노르’ 지역…모래폭풍 잦아들고 생태 복원 주민들 ‘협동조합’ 꾸려 경제 자립…스스로 사업하고 소득 배분   “처음 나무를 심을 땐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작은 나뭇가지들이 자라서 나무가 된다고? 하지만 보세요. 10년이 지나 이제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어요. 차차르간 열매를 수확해 돈도 벌고 있고요.” 지난달 28일 몽골 바양노르. 주민협동조합장 잉흐자르갈(51)씨가 플라스틱 통에 가득 담긴 주홍빛 열매를 가리켰다. 갓 수확한 열매를 기자에게 한 움큼 집어주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신맛이 났다. 차차르간 열매는 몽골 사람들의 대표적인 비타민 공급원이다. 주스, 차, 샴페인, 와인 등으로 가공돼 시중에 판매된다. 수확기를 맞은 요즘엔 14명의 조합원과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매일 200㎏ 가까이 딴다. 수확한 열매는 1㎏당 5000투그릭(몽골 화폐단위), 우리 돈으로 2300원 정도에 팔린다. 나무가 자라면서 매년 생산량이 늘어 올해는 수확량이 3t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열매를 팔아 벌어들인 수익금은 조합원들에게 공평하게 배분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로 매년 60차례 이상 모래폭풍이 몰아치던 바양노르에 ‘숲’이 생겼다. 높이 5m에 달하는 포플러와 비술나무가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다. 사막화로 가축을 잃은 바양노르의 유목민들은 소와 말, 양과 염소 대신 ‘비타민나무’라 불리는 차차르간을 기른다. 외부의 도움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주민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사업을 하고 소득을 만들어내는 ‘완전 자립’에 성공했다.   ‘환경난민’된 유목민들 바양노르에서 조림 사업이 시작된 건 지난 2007년이다.

[진실의 방] 아름다운 이별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난 우리의 끝을 생각했어.’ 대중가요 가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즘 기업 사회공헌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파트너십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10년 이상 꾸준히 사회공헌 업무를 해온 기업 담당자들을 만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영원한 파트너는 없다. 우리는 끝을 생각하고 시작한다.” 끝이라는 말이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수많은 국내 기업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양한 형태의 사회공헌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빈곤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해외 저개발국 주민들을 돕기도 하고, 쇠락한 국내 중소도시와 마을을 살리는 지역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인데요. 사업 기간이 종료돼 기업이 빠져나가면 그동안 쏟아부었던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사태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개발국에서는 기껏 지어놓은 건물이나 시설이 관리가 안 돼 폐허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무한정 도울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기업들이 생각한 게 ‘아름다운 이별’입니다. 기업과의 협업이 끝난 뒤 파트너가 완전히 ‘자립’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철저하게 이별을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이달 초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바가모요 지역의 푸가요시 마을에서 뜻깊은 ‘이별식’이 열렸습니다. 기아자동차와 굿네이버스가 5년 전 건립해 운영해오던 푸가요시 중등학교에 대한 소유권과 운영권을 지역사회에 완전히 넘기는 이양식(移讓式) 행사였습니다. 저개발국에 건물을 지을 때 보통 준공식이나 완공식은 해도 이양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에서는 이양식이 준공식이나 완공식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단순히 운영권을 넘기는 자리가 아니라, 파트너의 ‘진정한 자립’을 축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업 담당자들은 이날을 위해 최소

“블록체인, 사회문제 해결하는 공익적 기술… ‘대중화’가 목표”

한재선 그라운드X 대표 인터뷰 유엔, 기아 문제 해결에 블록체인 활용 자금 탈취·유용할 수 없어 현장에 도움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 출시 사용자 SNS 활동, ‘토큰’으로 보상 ‘디지털 재산권’ 보장 시대 열릴 것 가수의 노래가 담긴 ‘CD’는 중고로 사고팔면서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한 ‘음원’은 왜 다른 사람에게 되팔 수 없는 걸까? 돈 내고 전자책을 다운받았는데 서비스하던 회사가 망해 책이 날아갔다면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할까?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석연치 않지만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는 보장받을 길 없는 개인의 권리들. 이를 통칭 ‘디지털 재산(Digital Property)’이라고 부른다. 카카오(Kakao)의 블록체인 기술 계열사인 ‘그라운드X’의 한재선(47) 대표는 “블록체인 안에서는 이런 문제가 해소된다”고 말했다. 기존의 디지털 시스템에서는 데이터를 쉽게 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소유권을 인정받기 어려웠지만, 블록체인에서는 소유권이 명확해진다. 블록체인 데이터는 복제가 불가능하며 사고파는 모든 과정이 장부에 투명하게 기록되기 때문에 재산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라운드X는 지난 9일 서울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서 ‘블록체인 포 소셜 임팩트 콘퍼런스(Blockchain for Social Impact Conference)’를 개최했다. 블록체인이 기부, 공정 무역, 난민 지원 등에 활용된 사례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테헤란로에 있는 그라운드X 본사에서 만난 한재선 대표는 “블록체인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 불공정과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는 공익적 기술”이라며 “특히 디지털 재산권 보장은 블록체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람’을 품은 기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블록체인 포 소셜 임팩트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블록체인 기술의 사회적

“대학은 사회혁신의 실험장… 도전할 수 있게 ‘판’ 깔아줘야”

[인터뷰] 장용석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부원장   “세상을 바꿀 따뜻한 인재 기르자” 사회문제 해결에 뛰어든 대학들 학생들이 사회혁신 아이디어 내고 가치 만들도록 ‘고등교육의 틀’ 바꿔 “대학이 사회혁신의 실험장이 돼야 한다. 책 속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직접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해볼 수 있게 ‘판’을 깔아줘야 한다.” 지난 1일 만난 장용석(51) 연세대학교 고등교육혁신원 부원장(행정학과 교수)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번지는 대학의 사회혁신 움직임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회혁신가(Social Innovator)’ 양성을 미션으로 내건 대학들이 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따뜻한 인재를 키우는 게 이 시대 대학의 새로운 사명(使命)이 됐다”고 말했다.   ―’따뜻한 인재’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한국 대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제대로 들여다본 경험이 거의 없다. 초·중·고등학교 때까지는 학원 다니고 공부하느라 바빴을 테니까. 대학에 왔으니 지금이라도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속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들이 산적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동안 대학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곳에 취업하라는 말만 했다. 대학에서 아무리 많은 인재를 길러내도 세상에 부조리와 비리가 넘쳐나는 이유가 이런 개인주의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똑똑한 인재가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따뜻한 인재다.”   ―대학에서 인성교육을 하자는 얘기는 아닐 텐데? “사회문제가 생겨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형태도 복잡해지고 있다. 주입식 교육으로 배운 단편적인 지식으로는 눈앞에

[진실의방] 어느 자산가의 계획적 기부

  10억, 10억, 24억, 10억…. 지난 8년간 네 번에 걸쳐 총 54억원을 기부한 80대 자산가가 있습니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평생 모은 재산을 순차적으로 기부하고 있는 유휘성(81)씨 얘깁니다. 2011년과 2015년 각각 현금 10억원을 기부했고, 2017년에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24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통째로 고려대에 넘겼습니다. 2년 만인 지난 12일, 또 한 번 10억원을 쾌척해 화제가 됐는데요. 고려대 고액기부 담당자는 “점심이나 먹자며 찾아온 유휘성 기부자가 갑자기 10억원짜리 수표를 건네서 다들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의 기부엔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펀드레이저(모금 전문가)들에 따르면 10억원 이상의 고액기부를 이렇게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유씨의 기부를 전형적인 ‘계획기부(Planned Giving)’라고 설명합니다. 기부의 목적과 형태, 규모를 신중하게 설계하고 결정해 계획적으로 자산을 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죠.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유산기부’도 계획기부의 한 종류입니다. 미국과 같은 기부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계획기부가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들어서야 개념이 도입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씨는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언제 얼마나 기부할지에 대해 본인만의 분명한 플랜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일정한 시기를 두고 재산을 적당히 끊어가며 모두 주고 가겠다는 계획이죠. 다 못 주고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증(유언을 통해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해둔 상태입니다. 본인의 기부 스케줄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돈을 줄 땐 상당히 ‘쿨’합니다. 반면 본인의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무척 깐깐하게 ‘감시’합니다. 수시로 학교에 연락해

어느 날, 노숙인에게 집이 생겼다…’脫노숙’을 위한 2년의 실험

#1 어쩌다 노숙인 K에게 집이 생겼다.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과 음식을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싱크대가 있는 5평짜리 작은 원룸. K는 그곳을 ‘알토란 같은 내 집’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점잖은 말투. 서울 마천동 주택가의 한 건물에서 만난 K는 동네에서 오며 가며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술에 절어 거리를 전전하고 찬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K를 ‘노숙자’라고 불렀다. 2004년에 거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여섯. 노숙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꽤 전형적이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 다니던 직장이 망했다. 치킨집도 차려보고 택시 운전도 해봤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괴로운 마음에 술과 도박에 빠졌고 이혼으로 이어졌다. 전세금 빼서 술 마시고, 월세도 밀리게 되자 거리로 나갔다. 영등포역 노숙인들과 술 먹고 어울려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들과 같은 모습이 돼 있었다. 대부분의 노숙인이 그렇듯 K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을 앓았다. 막노동을 하고 일당을 받아 술을 사 먹었다. 하루 소주 4~5병은 예사로 마셨다. 계속된 노숙 생활로 몸이 망가지면서 치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두 개 빠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었다. 치아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술을 끊지 못했다.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해 80㎏이던 몸무게가 60㎏으로 줄었다. 노숙인 시설로 들어간 건 2006년. 7~8명이 한방에서 생활했다. 술은 철저히 통제됐다. 외출도 외박도 안 됐다. 시설 입소 노숙인들은 그 생활을 견디지 못해 다시 거리로 뛰쳐나갔다.

[진실의방] 스마트폰이란 게 나왔다며?

스마트폰을 처음 접한 건 기자 6년 차 때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은 ‘선택’의 대상이었죠. “스마트폰이란 게 나왔다던데 쓸 거야? 말 거야?” 하는 식이었습니다. 자판이 없는 것도 어색하고 조작법 익히는 것도 귀찮아서 ‘안 쓴다’ 쪽에 손을 들었는데, 어느 기자 선배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앞으로는 스마트폰을 쓸 수 있는 사람과 쓸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이 올 거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뒤처지고 도태될 것이니, 사용법이 다소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써야 한다.” 서너 살짜리 어린애들부터 어르신들까지 누구나 스마트폰을 다루는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죠. 조선일보 공익 섹션 ‘더나은미래’가 이달로 9주년이 됐습니다. 스마트폰을 살지 말지 고민했던 예전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건, 더나은미래의 역대 지면들을 살펴보며 비슷한 종류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공익에 대한 대중의 인식, 공익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 공익을 다루는 언론의 방식 등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초창기 발행된 더나은미래는 주로 기업 사회공헌이나 NPO(비영리단체)들의 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도왔느냐’에 관한 이야기죠.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이 커지고 모금 시장이 급성장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나눔, 기부, 국제구호개발 등 다양한 영역의 이야기가 잔칫상처럼 푸짐하게 지면에 차려집니다. 이후 본격적인 ‘소셜(Social)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부나 기업, 소수의 리더가 주도하던 공익의 판이 시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더나은미래의 내용과 관점도 확 달라지죠. ‘얼마나 많이 도왔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신가들, 환경·난민·동물·젠더

[Cover Story] 각개전투서 사회공헌 동맹으로…’착한 성과’ 위해 머리 맞대고 공부합니다

[Cover Story] 기업 CSR 담당자들의 자조모임 ‘CSR포럼’  한 달에 한 번 기업 사회공헌 분야를 담당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팀장들이 서울 모처의 강의실로 모여든다. 삼성·SK·현대 등 대기업부터 이제 막 CSR에 뛰어든 중소기업 담당자들까지 모두 한공간에 둘러앉아 CSR을 공부한다. 열심히 듣고, 받아 적고, 토론한 뒤 해산한다. 흔한 뒤풀이도 없는 심심한 모임이지만 6년째 이어지고 있다. CSR 담당자들의 자조모임 ‘CSR포럼(Forum)’ 얘기다. 지난 2014년 1월 설립된 CSR포럼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기업 CSR 담당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발적으로 꾸린 모임이다. ‘어떻게 하면 사회공헌을 전문성 있게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는 순수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회원들은 매월 넷째 주 금요일에 열리는 정기 포럼에 참여해 CSR 관련 주제로 발표하고 의견을 나눈다. 현재 350여 개 기업, 54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됐을 정도로 성장했다. 김도영 CSR포럼 대표는 “사회공헌에 대한 고민을 넘어 기업이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대표 멤버 6인을 만났다. ◇기업 간 CSR 경쟁 무의미… 노하우 아낌없이 공유 ―CSR 담당자들이 모여서 CSR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어떻게 시작된 모임인가? 김도영=원래 사회공헌팀은 기업 내부에서 주목받는 팀이 아니었다. 실무자들은 각개전투식으로 사회공헌이란 분야를 개척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서로의 경험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담당자들에게 제안했다. ‘기업 안에서 외롭게 사회공헌하지 말고 밖에 모여서 같이 즐겁게 해보자’고. 첫 모임에 무려 60명이 모였다. 김상두 CSR스페셜리스트(한국암웨이)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