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진실의방] 어느 자산가의 계획적 기부

 

10억, 10억, 24억, 10억….

지난 8년간 네 번에 걸쳐 총 54억원을 기부한 80대 자산가가 있습니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평생 모은 재산을 순차적으로 기부하고 있는 유휘성(81)씨 얘깁니다. 2011년과 2015년 각각 현금 10억원을 기부했고, 2017년에는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있는 24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통째로 고려대에 넘겼습니다. 2년 만인 지난 12일, 또 한 번 10억원을 쾌척해 화제가 됐는데요. 고려대 고액기부 담당자는 “점심이나 먹자며 찾아온 유휘성 기부자가 갑자기 10억원짜리 수표를 건네서 다들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의 기부엔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펀드레이저(모금 전문가)들에 따르면 10억원 이상의 고액기부를 이렇게 주기적으로 실천하는 케이스 자체가 국내에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유씨의 기부를 전형적인 ‘계획기부(Planned Giving)’라고 설명합니다. 기부의 목적과 형태, 규모를 신중하게 설계하고 결정해 계획적으로 자산을 기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죠.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유산기부’도 계획기부의 한 종류입니다. 미국과 같은 기부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계획기부가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들어서야 개념이 도입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씨는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지, 언제 얼마나 기부할지에 대해 본인만의 분명한 플랜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일정한 시기를 두고 재산을 적당히 끊어가며 모두 주고 가겠다는 계획이죠. 다 못 주고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유산을 기부하겠다는 유증(유언을 통해 재산을 증여하는 것)을 해둔 상태입니다. 본인의 기부 스케줄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돈을 줄 땐 상당히 ‘쿨’합니다.

반면 본인의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무척 깐깐하게 ‘감시’합니다. 수시로 학교에 연락해 기부금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잘 사용되고 있는지 체크하고, 잔액이 얼마 남았는지 묻기도 하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호통을 치기도 합니다. 유씨의 이런 감시와 관심을 담당자들은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어렵게 모은 재산을 믿고 맡긴 기부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입니다.

기부하고도 욕먹는 부자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영혼 없이 기부하면 어김없이 욕을 먹습니다. 영혼을 다른 말로 바꾸면 ‘철학’이죠. 돈에 대한 철학. 유씨는 첫 기부를 한 뒤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돈은 체온과 같아서 따뜻할 때 나누는 게 좋다. 살아있을 때 더 많은 사람과 나의 체온을 나누고 싶다.” 그의 계획적 기부가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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