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유년기의 끝

영국의 SF 작가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가 1953년 출판한 ‘유년기의 끝’이라는 책이 있다. SF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갑작스러운 외계인 ‘오버로드’의 출현으로 급속도로 진화하는 인류 문명과 그 끝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70년 전에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 풍요에 따른 정신과 문화의 권태, 그에 대응하기 위한 예술, 철학 공동체의 노력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다른 작품들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부분은 결국 인류 문명의 종말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싶다. 혹시 책을 안 본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안전하게 표현하자면, 이 작품에서 인류가 맞이하는 운명은 어떤 이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종말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에서 표현하는 영적 부활에 가까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소설 제목에 쓴 ‘유년기’란 말 그대로, 어떤 의미로든 인류는 한 단계를 넘어갔다는 점이다. 현실의 인류는 지금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게감으로 ‘한 시대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72년 지구의 미래를 연구하는 기관인 ‘로마클럽’이 MIT에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예측하는 프로젝트를 의뢰했는데, 인류가 자연에 존재하는 비재생 가용 자원을 과잉 개발하고 낭비한 끝에 21세기 중반에 정점을 찍고 쇠락할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 국제 회계 컨설팅 업체 KPMG 연구진이 50년 전 로마클럽의 분석에 최신 데이터를 반영해 검증한 결과, 당시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구체적으로는 2040년경 급격한 쇠퇴가 시작될 것으로 드러났다. 인류 문명의 급격한 쇠퇴가 곧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험난한’ 탄소 중립의 길

지난달 18일, 대한민국 2050 탄소중립위원회는 제2차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2050 탄소 중립 시나리오안’과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안’을 심의, 의결했다. 2차 회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기존의 2018년 대비 26.3% 감축에서 40% 감축으로 상향하는 것이었다. 당장 해외에 있는 탄소 중립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 단체의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 정부의 과감한 결정에 기쁘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들이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한국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아주 복잡한 반응들을 듣고 있던 나는 선뜻 ‘나도 즐겁다’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칼럼을 통해 반복해서 이야기한 내용이지만, 탄소 중립은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류가 공격적으로 탄소를 배출해왔던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어야만 탄소 중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차피 고통스러울 것이라면 최대한 자원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때그때 임시 처방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지금 한국의 탄소 중립을 위해 가장 뜨거운 화두인 수소 관련 정책들은,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으로 전기분해를 통해 추출한 ‘그린수소’를 사용해야만 탄소를 감축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2020년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은 6.6%에 불과하다. 또한 국토 면적이 좁고, 평지가 적으며, 인구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의 특성상 재생에너지 시설을 추가로 확충할 여지가 많지 않다. 실제로 재생에너지 비율이 최상위권인 국가들은 대부분 지형 조건의 영향으로 수력발전 비율이 높은 경우가 많다(노르웨이 93.4%, 브라질 64.4% 등). 그렇다면 한국에서 현재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더 이상 물 쓰듯 쓸 수 없는 물

‘푸른 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 표면의 70% 를 물이 덮고 있는 지구는 그야말로 물의 행성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인간을 비롯한 육지 생명체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민물의 비중은 3% 정도이고, 빙하와 만년설을 제외하고 실제로 사용 가능한 지표수와 지하수의 비중은 1% 미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1% 미만의 담수로도 인류 문명은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뤄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담수 자원을 말 그대로 ‘물 쓰듯’ 하며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리고 이 연재글의 내용이 항상 그러했듯이, 안타깝게도 이러한 풍요로움도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이미 물 부족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이슈다. 이론적으로 담수 자원은 현재 인류의 사용량을 충당할 수 있지만 담수 자원의 지리적 분포와 중저소득 국가의 부족한 인프라로 인해 전 세계 인구의 26%인 20억명이 안전하게 관리된 식수를 공급받지 못한다. 이로 인해 연간 200만명 이상이 수인성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비효율적인 담수 자원 사용과 수질 오염,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담수가 풍부한 지역에서도 수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하 대수층 37개를 관찰한 결과, 21개의 수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중 13개는 심각한 수준의 물 스트레스(물 유입보다 유출이 훨씬 많은)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군다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각종 곡창지대의 기상이변, 특히 가뭄이 증가하면서 지하수 유출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전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하나인 미국 캘리포니아는 2000년 이후 빈발하는 가뭄으로 인해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게으른 소비 먹고 자라는 ‘포장 배송’이라는 가오나시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꼽히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는 ‘가오나시’라는 매력적인 조연 요괴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지만, 온천 직원들의 물질적인 욕망을 들어주면서 비대하게 커져가는 이 요괴는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풍자라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이 요괴만큼이나 능숙하게 ‘편리함’이란 인간의 욕구를 빨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는 산업이 있으니 바로 포장 배송이다. 전 세계적인 도시화, 고령화,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라 e-커머스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2014년 1조3000억달러였던 e-커머스 매출은 3년 만에 2017년 2조3000억달러로 증가했고, 코로나 대유행으로 인한 비대면 문화로 성장세가 폭발, 2021년에는 4조5000억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총알 배송’ ‘로켓 배송’ 등으로 익숙한 ‘퀵커머스’도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퀵커머스는 물류 및 플랫폼 투자로 소량 주문이라도 30분 이내로 배송하는 것으로, 터키의 ‘게티르(Getir)’라는 스타트업은 초고속 식료품 배달을 기치로 올해 6월 5억5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터키 둘째 유니콘으로 부상했다. 배달 플랫폼 연합체 딜리버리 히어로의 CEO였던 랄프 벤젤도 올해 ‘조크르(Jokr)’란 이름의 퀵커머스를 설립하였다. 게티르가 진출한 영국의 한 매체가 보도한 것처럼,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도 가기 귀찮은 사람들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MIT 부동산 혁신 연구소에서는 올해 1월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쇼핑을 비교하며 온라인 쇼핑에서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더 적은 탄소를 배출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단일 배송이 아니라 여러 상품을 묶음 배송하고,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퀵커머스는 소비자 편의성이라는 절대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최적화되지 않은 선의

사회 전체의 공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즉 비영리, 자선사업, 소셜벤처, 임팩트 비즈니스와 임팩트 투자 등을 하는 이들이 취약한 부분 중 하나가 철저한 ‘자기 검열’이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하이에크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고 했을 때는 전체주의의 폐해를 경고한 것이지만, ‘나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소명에 진정성 있으니 틀릴 리 없어’라고 맹신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2017년 출간되었던 윌리엄 매커보이 저 ‘냉정한 이타주의자’가 중점적으로 지적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잘 쓰는 것’과 ‘가장 잘 쓰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한데, ‘선의’라는 기치를 내거는 순간 돈을 어떻게 잘 활용할지 검증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지는 것이다. 잠비아의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2012년 출간한 책 ‘죽은 원조’를 통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이 1970년대 이래로 3000억달러 이상의 천문학적 지원금을 받았는데도 끝이 없는 빈곤과 부패의 수렁에 빠진 것을 바로 그 ‘잘못 사용된 원조’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원조를 ‘치유책을 가장한 질병’으로 부르며, 다양한 차관과 증여가 받는 이들의 부패와 갈등을 조장하고 자유 기업 체제를 방해한다고 한다. 아프리카 국가에 가장 필요한 지원을 하기보다, 서방국가들의 행정 편의에 맞춘 원조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임팩트 투자 또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자 네트워크 ‘토닉’(Toniic)의 창립 CEO였던 모건 사이먼이 올해 초 출간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에서 이러한 사례를 언급한다. 예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멕시코 테우안테펙 지협의 풍력발전 프로젝트는 지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어둠 속의 속삭임

계속해서 이어지는 변이로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사람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곳에서도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거론 자체가 터부시 되는 ‘정신 건강’ 문제가 그중 하나다. OECD에 따르면 코로나19 유행이 본격화한 2020년 3월부터 전 세계적으로 불안과 우울증 유병률이 증가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두 배까지 증가하였다고 한다. 재정적 불안, 실업, 감염에 대한 공포 등 정신 건강에 대한 위험 요소가 증가한 반면 사회적 연결, 고용, 신체 운동, 의료 서비스 접근성 등 보호 요소는 감소한 결과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문제 해결이 더욱 까다로운 정신 건강은 이미 국제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국제보건기구에 따르면 2017년 전 세계 인구의 약 13%인 9억 7100만명이 정신 질환을 겪고 있으며, 유병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가장 흔한 정신 질환은 우울증(3억명)과 불안증(2억 8000만명), 그리고 약물 사용 장애(1억 5000만명)이다. 한국도 정신 건강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18세 이상 국민 중 25.4%는 평생 한 번 이상 정신과적 질환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OECD 국가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전반적인 지표가 악화하고 있고, 특히 20대와 30대 우울 위험군 비율이 각각 30%와 30.5%로 60대(14.4%)보다 2배 이상 높아 젊은 층의 정신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정신 건강이 중요한 이유는 질병을 앓는 사람뿐 아니라 그 주변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018년 영국 의학지 ‘The Lancet(더랜싯)’에서 발행한 리포트(Lancet Commission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가상 세계도 탄소를 배출한다

나아질 것 같으면서도 나아지지 않는 코로나19에 영향을 받는 것은 많지만, 그중 특히 수혜를 본 영역 중 하나는 디지털 전환일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거리 두기를 강제당하면서, 인류는 현실에서 하는 많은 것이 디지털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요즘 메타버스(Metaverse)가 폭발적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며, 콘텐츠 영역에서 일하는 지인과, 가상 세계의 성공은 그럴듯한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현실 세계가 망가지는 데 달렸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디지털 전환은 인류에게 필수 불가결한 단계다. 인류 생활의 모든 것이 전산화되고, 데이터가 축적되어 그것들을 바탕으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2010년 1분기에 전 세계 시가총액 상위 회사 10곳 중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둘만이 디지털 관련 회사였는데, 2021년 1분기 시가총액 상위에는 사우디 국영 석유 회사 아람코를 제외한 9곳이 디지털 관련 회사라는 것이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전환의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 인터넷 사용량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전 세계 인터넷 인구는 2004년 약 9억명에서 2020년 약 48억명으로 늘었고, 특히 중저소득국에서 빈약한 보건, 교육, 의료 인프라 등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진행하면서 모바일 인터넷 사용량은 더욱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것은, 방금 전까지 눈앞에 존재하던 현실을 디지털로 전환한다고 해서 그 물리적 비용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누리던 만큼 더욱 높은 해상도로 생생하고 그럴듯하게, 또한 끊김 없이 디지털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갈 곳 잃은 여행자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많은 시련을 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궤멸적인 피해를 본 산업 중 하나가 여행·관광 산업이다. 2019년 전 세계 GDP의 10.4%를 차지하던 여행·관광 산업은 2020년 5.5%로 약 49.1%(약 4조5000억달러)나 감소했고, 관련 일자리도 18.5%가량 감소했다. 정부의 긴급 보조금을 가장 많이 수혈받은 업계 중 하나였는데도 이 정도라면 실제 여행·관광 업체 종사자들이 느낄 고통은 얼마큼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무착륙 비행’이라는, 기후변화 시대에 상상하기 어려운 고탄소 배출 상품이 인기를 끈 것도 결국 이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리라. 예상보다 장기화되는 코로나에 해외여행 욕구가 커진 고객들과, 당장 현금이 없어 피가 마르는 관광 업계와 항공 업계의 수요가 맞아 도착지도 없이 면세점 쇼핑과 비행만 하는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이래저래 씁쓸하다. 설령 갈 곳이 없어도 훌쩍 떠나고 싶은 욕구를 지닌 인류가,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점점 발목이 묶일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여행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장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여행 산업을 위한 비영리 민간단체 ‘서스테이너블 트래블 인터내셔널(Sustainable Travel International)’에 따르면 관광 산업은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8%를 차지하며, 그중 절반이 이동 수단에 의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이전까지 중국, 인도 등 최근 경제 성장이 가파른 국가의 해외여행 수요가 폭증하고, 저가 항공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1990년 5억t 수준의 항공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18년 10억4000만t이 돼 두 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온실가스 배출을 차치하더라도 관광은 해당 지역에 큰 사회적, 환경적 부담을 준다. 수용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인류에게 던져진 不和의 황금사과

어린 시절 열심히 읽던 그리스 신화 세계관의 시작은 바로 트로이 전쟁에 대해 다룬 ‘일리아스’였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아카이아인과 트로이인들을 통해 대리전을 펼치는 이 중요한 이야기가 ‘에리스’라는, 그리스어로 ‘불화(不和)’를 뜻하는 여신에게서 시작됐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불화와 이간질의 여신인 에리스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 사이도 이간질하며 불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터를 전쟁의 신 ‘아레스’와 함께 누비며 자신이 일으킨 파괴의 흔적을 즐기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에리스가 열심히 가꾸는 ‘불화의 황금사과 과수원’쯤이 아닌가 싶다. 코로나19와 같은 글로벌 팬데믹, 시시각각 닥쳐오는 기후변화 등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문제가 산적한 상황인데도 인류는 대동단결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서로 갈라져 다투느라 여념이 없다.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극단주의다. 정치, 종교, 사회적 이슈 전반에 걸쳐 극단주의가 세계적으로 범람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극단주의는 자신이 믿는 이데올로기를 ‘극단적’으로 내세워 자신과 타인 모두의 이익을 짓밟는 비합리적 행동으로 치닫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었던 백인 우월주의 단체 프라우드보이스나 음모론을 신봉하는 큐어넌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현재 이러한 극단주의가 자라날 최적 상황이 조성됐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후 자본의 세계화와 반복된 경제 위기는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한 국가들의 중산층을 붕괴시켰고, 빠른 속도로 양극화가 진행됐다. 실업률 증가, 정부 복지 재정 고갈은 일본·영국·미국 등 선진국들의 급격한 우경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또한 중국과 미국의 패권 정치와 아프리카, 중동 정세 악화로 인한 대규모 난민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팔열팔한지구(八熱八寒地球)

대부분의 종교는 사람들에게 선악을 가르치기 위해 각자의 문화권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천국’과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의 모습을 상상했다. 흥미로운 것은 천국의 모습은 문화권별로 차이가 있는 데 비해, 지옥은 대부분 묘사가 겹친다는 것이다. 그곳은 불타거나, 얼어붙어 있는, 고통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고대의 종교인들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에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지구의 풍경을 보게 된다면, 아마도 종말이 다가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것 같다. 2020년은 지구 기온 사상 최고를 경신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럽 지역은 관측을 시작한 이후 2010년까지의 평균기온에 비해 2020년 기온이 2.2도나 높았다. 겨울철 온도가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시베리아 북동부 북극권 인접 지역 베르호얀스크는 6월 평균기온이 평소 20도에 불과한 곳이었으나 작년 6월에는 38도를 기록했다. 반면 올해 2월에는 30년 만의 최악의 한파가 미국 중부, 남부를 덮치면서 세계 최강 대국 미국에서 수도와 전기가 끊기고 석유 시설의 생산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시기보다 1.1도 이상 증가하면서 열대 폭풍의 빈도와 강도는 올라가고, 제트기류의 약화로 인해 극지방에 갇힌 차가운 공기 덩어리인 극소용돌이(Polar Vortex)가 남하하면서 폭한 사태를 발생, 전 세계적인 폭염과 가뭄, 그로 인한 산불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기후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서, 인류 사회에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독일의 비영리 민간기후연구소 저먼워치는 21세기에 들어서 20년간 1만1000건이 넘는 이상기후가 발생했고 이로 인한 사망자가 47만5000명, 피해액은 2조5600억달러(약 2826조원)에 이를 것으로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역신의 시대

인류가 누리는 삶의 질을 드라마틱하게 개선한 것을 꼽자면, 무엇보다도 공중위생과 의료보건 영역일 것이다. ‘등불을 든 여인’ 나이팅게일이 이름을 남긴 것도 크림전쟁에서 위생정책 개선을 통해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40%에서 2%로 감소시켰기 때문이고, 때만 되면 기승을 부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던 천연두, 장티푸스. 콜레라의 사망률을 급격히 낮춘 것은 백신과 항생제의 개발이었다. 아마도 인류는, 적어도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국가에서는 고령화와 불규칙한 생활습관으로 인한 대사질환 증가 이외에는 의료보건 영역에서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자만하던 인류에게 코로나19는 우리의 의료보건 대응 능력이 한참 부족하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함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는 최신 정보가 온 사방에 업데이트되고 있으니 굳이 다시 다루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인류는 역신이 날뛰는 시대로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 신종 인플루엔자, 메르스, 에볼라 바이러스, COVID-19 등 주요 신종 감염병만 30여개 이상 발견됐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정책동향에 따르면 한때 소멸했던 감염병이 새롭게 만연하거나 재출현하는 동향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트렌드는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인해 나타나는 기후변화의 결과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밀림 개발과 삼림 파괴로 인해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증가하고, 동물에게만 존재하던 새로운 감염병이 퍼지게 될 뿐 아니라, 대기 기온이 상승하고 그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질병을 매개하는 진드기와 모기가 증가하게 된다. 한국의 전문가들은 기상청의 예측대로 2040년 제주 해안의 겨울철 평균 기온이 섭씨

[정경선의 최적화 인류] 멀지 않은 아틀란티스

현대 인류에게 지도란 20세기 중반 이후로 꽤나 안정적이었다. 아주 드물게 새로운 정부와 함께 국가명이 변경되는 사례가 있었지만, 그게 아닌 이상 국경선이나 대륙의 해안선 등은 매년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최근 주요 거점 도시가 낮은 해발고도에 있는 국가,즉 싱가포르·인도네시아·베트남 등이 큰 고민에 빠진 것은 이 ‘당연한 일’이 더는 당연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에도 위험한 상황임을 뜻한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과 그린란드의 빙하가 급속도로 녹으면서, 전체 담수의 75%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게다가 해온 자체가 상승하면서 부피가 커져 전 세계적인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NASA와 유럽 인공위성 데이터를 분석한 과학자들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연평균 2.5mm씩 상승하던 해수면은 2010년대 말에 연평균 3.4mm씩 상승하고 있다. 해빙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보면 앞으로 해수면 상승은 점점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후 과학 비영리 단체인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이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게재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해수면이 10cm 상승할 때마다 해안 지역에 홍수와 범람이 일어날 확률이 2배씩 상승한다. 현재 추세대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 이변이 악화하면, 2050년에는 아시아에서만 1억명 가까운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이 매년 만성적인 침수 피해를 당하게 된다. 광저우·셴젠이 위치한 주강 삼각지 지역, 베트남 남부, 인도네시아 대부분의 거점 도시들, 방콕 등이 대표적인 피해 지역이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해 있지만, 이러한 침수 피해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산업공단들과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