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주년 특별 좌담회… 기부의 미래를 말한다
‘백만달러 기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백만달러(10억원) 이상 기부자의 기부금 총액은 총 263억달러(28조원)에 달한다. 전년 대비 70억달러(7조6000억원) 증가한 수치다. 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이른바 ‘수퍼 리치(Su per rich)’들이 기부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선 ‘메이저 기프트(major gift·고액기부)’보다 한 단계 높은 ‘메가 기프트(mega gift·초고액 기부)’가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우리나라도 최근 몇 년 새 고액 기부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초고액 기부 시대를 준비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더나은미래’는 정부, 학계, 비영리단체, 금융기관 등 전문가들과 함께 ‘초고액 기부 시대 열리나’를 주제로 창간 5주년 특별 좌담회를 열었다. 박란희 더나은미래 편집장의 사회로 열린 이날 좌담회에는 강학봉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본부장, 김현아 아름다운재단 나눔사업국장,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상속신탁팀장, 성열기 삼성패밀리오피스 센터장, 이상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이재란 보건복지부 나눔정책팀장, 최임열 법무부 상사법무과 검사(가나다순) 등이 참석했다.
◇부동산·주식 등 비현금성 자산 기부 늘어… 초고액기부 시대 열렸다
사회=우리나라도 기부금 10조 시대를 넘어섰다. 고액기부자들이 몇 년 새 부쩍 늘어나는 등 기부 문화 확산 속도가 무척 빠르다. 현장에선 초고액 기부 시대에 얼마만큼 근접했다고 체감하는가.
강학봉=1억원 이상 기부하는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수가 2008년 6명에 불과했는데, 지난해 가입자만 272명에 달할 정도로 7년간 100배 이상 덩치가 커졌다. 매년 2배 이상 늘면서, 수십억원대 기부를 문의하는 자산가들도 급증하고 있다. 특히 최소 10억~20억원대 부동산·주식·보험 등 비현금성 자산 기부를 약속하는 분들이 한 달에 2건 이상으로, 그 총액만 230억원에 달한다. 초고액 기부 시대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배정식=그동안 하나은행 VIP 중 상업용 부동산을 가진 자산가 및 중견기업 CEO를 대상으로 600여건의 상속 및 자산관리 상담을 진행해왔는데, 최근 싱글 여성·기업 CEO 및 부동산 자산가의 초고액 부동산 기부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실제로 지난달 수십억원대 아파트를 개도국 아동 후원을 위해 사후 기부하겠다는 여성분을 월드비전에 연계해 유언대용신탁을 체결하기도 했다. 특히 부동산 기부는 주식·보험 기부보다 복잡하고 투명성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전문적인 자산관리 컨설팅 체계를 갖춰야 한다.
성열기=’삼성패밀리오피스’는 3년 전부터 초부유층(VVIP)의 자산·후계자 양성·명예 및 사회적 가치 등을 포괄하는 가문 관리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실제로 컨설팅을 통해 만나는 고액 자산가들의 경우 자산의 90% 이상이 부동산과 주식이더라. 또 하나의 특징은 고액 자산가들이 기부한 돈의 흐름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특히 기부금이 클수록 적어도 분기별로 사용 내용을 피드백받고자 하는 등 비영리단체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현아=초고액 기부 시대를 준비하면서 투명성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전문성이다. 최근 고액 자산가들은 내가 어디에 얼마를 기부했느냐보다 나의 기부금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사회적 임팩트(Social impact)’에 관심이 많다. 기부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익 사업을 하는 비영리단체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기부금에 대해 의사결정권을 가지려는 고액 기부자 역시 공익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부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많은 돈을 기부한 만큼 효과성을 함께 높여갈 수 있다.
이재란=부유층의 사회적 책임과 실천을 요구하는 사회 목소리가 커진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지난해 국내 나눔 실태를 조사하면서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과반수가 ‘사회 지도층과 부유층의 모범적인 기부 증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우리나라도 이제 내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상속 문화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유산 기부 문화로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재단 설립 대신 신탁 등 다양한 기부 상품… 초고액기부자 마음 연다
사회=선진국의 경우 초고액 기부자들을 위한 다양한 기부 상품이 많다. 기부자 조언 기금(Donor Advised Fund), 유증(Bequest), 기부 연금(CGA: Charity Gift Annuities), 공익 신탁 등이 활발하다. 공익 신탁법이 이제 시행되면서, 국내에도 조금씩 ‘기부와 금융이 만나는 기부 상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하다.
이상신=과거 금리가 10% 넘을 때는 재산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하고, 이자로 사업비·운영비를 감당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100억원을 출연해도 인건비·운영비만으로 이자 수입 2억원을 초과하니 공익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고, 재단 설립이 국가적 낭비란 말이 나온다. 차라리 그 돈을 신탁한 뒤 원하는 곳에 기부하고 투명하게 관리받는 공익 신탁 상품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최임열=지난 3월부터 새로 제정된 ‘공익 신탁법’이 시행됐다. 재단을 설립하려면 등기를 하기까지 설립 절차가 복잡하고, 새로 조직을 꾸려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공익 신탁은 계약 체결 후 법무부 인가만 받으면 되니 상대적으로 간편하다. 게다가 공익 신탁의 사업계획 등 운영 내용이 전부 공시되고, 법무부가 직접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투명성이 보장된다. 기부자가 지정한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나만의 재단’을 갖는 효과까지 있다. 이에 은행·개인사업가로부터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대기업 그룹 관계자들은 계열사 간 기부 및 사회공헌이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서, 차라리 계열사가 공동 출연해 수백억원대 공익 신탁을 하고 운영위원회를 통해 이를 효율적으로 기부·관리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강학봉=아쉽게도 공동모금회와 같은 법정기부금 단체는 공익 신탁을 받는 경우에도 법정기부금 처리가 안되고 지정기부금 처리만 가능하다. 법적 보완이 필요하다. 공동모금회는 2012년부터 신한은행과 함께 기부자 조언 기금을 운영해왔는데, 금리가 낮고 위험 투자 심리가 약한 우리나라에선 수익률을 높이기 어려웠다. 기부자 의사대로 기금을 운용하려면 인력·자원 투입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기관에 전달할 수수료도 만만치 않게 높았다. 이에 지난해부터 변호사·세무사·펀드레이저 등 전문가들과 팀을 이뤄 초고액 기부자들을 위한 맞춤형 부동산·증권·보험 기부 상담(희망 자산 나눔 캠페인)을 시작했다.
김현아=사실 고액 기부자로부터 직접 기금을 받고 있는 비영리단체들은 굳이 공익 신탁을 활용해야 할 만큼 이점이 많지 않다. 게다가 신탁자 의사에 따라서 기금을 운용하려면 비영리단체 고유의 정관이나 목적에 맞지 않는 사업을 하게 될 수 있고, 신탁자를 위해 신사업을 꾸리다가 재정적 리스크에 빠질 위험도 있어 조심스럽다.
배정식=법무부가 투명하게 직접 관리·감독하고, 기부자가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공익 신탁을 선호하는 초고액 기부자가 많은 건 사실이다. 공익 신탁을 중심으로 고객에게 권할 수 있는 다양한 기부 상품이 있을 때 기부 계약 성사율도 높더라. 하나은행은 1971년부터 국내 유일의 공익 신탁 상품인 ‘행복나눔신탁’을 운영하면서 169억원(1665계좌)을 기부했고, 그 노하우를 살려 4가지 종류의 신탁 상품을 갖췄다. 유언장 없이 원하는 상속인에게 집행을 돕는 유언대용신탁, 임차인을 상대해 직접 임차료를 받고 건물 관리를 해주는 부동산 관리 신탁, 일정 금액 기부 시 진료 예약부터 퇴원까지 전담팀의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나-SNU 기부신탁, 상속·치료 등 종합적인 자산관리를 진행하는 하나케어트러스트가 그 예다. 실제로 분당서울대병원과 진행하는 기부 신탁은 올해만 벌써 4건의 계약이 성사됐다.
이재란=고액 자산가가 아닌 중산층 가정에선 기부를 하고 싶어도 생활이 어려워질까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복지부에선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기부도 하고, 일정액은 연금으로 받아 노후 생활을 꾸리는 ‘기부연금제’ 도입을 위해 나눔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부의 복지예산이 아무리 늘어도 사각을 전부 메울 순 없기 때문에, 잠재적 기부자를 늘려 나눔 문화가 확산되길 바란다.
◇인식 개선·소통·협력으로 한계 뛰어넘어야
사회=초고액기부 문화를 확산하려면, 법적·제도적 보완과 함께 우리나라 전체의 기부 인식도 높아져야 하는 등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어떤 노력이 가장 필요할 것으로 보는가.
김현아=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인 고(故) 서성환 회장의 가족으로부터 주식을 기부받아 한부모여성가장 창업을 돕는 기금을 조성했는데, 10년 넘게 사업을 지속하면서 250명의 여성 가장이 가게를 열었다. 이처럼 고액자산가의 기부가 사회로 흘러 들어가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사례를 지속적으로 발굴해야만 초고액 기부가 확산될 수 있다.
성열기=공감한다. 특히 CEO의 경우 해당 기업을 일구는 데 도움을 받은 지역 사회에 가장 먼저 기부하고 싶어 한다. 처음엔 1억원, 이듬해엔 10억원으로 단위도 점점 커진다. 컨설팅할 때마다 고액 자산가들에게 롤모델이 될 만한 사례를 보여드리고 싶어도, 언론에 노출된 모범 사례들을 찾기 어렵더라. 의미 있는 초고액 기부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도된다면, 편법 상속·증여란 편견 때문에 선뜻 기부하지 못하던 잠재적 기부자들의 주머니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이상신=초고액 기부를 이끌어내려면 세금 공제 혜택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 영국은 유산의 10%를 기부하면 상속세를 40%에서 36%로 감면해, 고액 기부를 독려하고 있다. 또한 주식을 재단에 신탁할 때 배당금으로 공익 사업을 하고, 후계자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갖춰진다면 공익법인도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초고액 자산가도 신탁을 충분히 활용하는 윈윈(win-win) 사례가 나올 수 있다.
최임열=공익 신탁 제도가 기부 문화의 주춧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설서 발간, 유관 기관 설명회 등 홍보를 지속할 계획이다. 금융기관, 비영리단체와 함께 공익 신탁 상품 개발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싶다. 법정기부금 지정 등 세제 혜택을 위해서도 관련 부처와 협의할 예정이다. 언론에서도 공익 신탁 제도가 초고액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배정식=VIP를 상담하는 금융기관의 자산관리 PB들을 위한 공익 분야 교육, 금융기관과 비영리단체 실무자들 간의 소통도 중요하다. 오늘 좌담회에 모인 각 분야 전문가들이 서로 역량과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소모임이 많아져야만 초고액 기부 시대를 함께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강학봉=비영리단체에 대한 전문성 인정과 신뢰도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기부금의 30%까지 비영리단체의 인건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우리나라는 비영리단체에 왜 인건비·운영비를 지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게다가 부동산·보험·주식 등 초고액 기부 상품을 개발하다 보니 걸리는 법이 너무 많더라. 법마다 소관 부처가 모두 달라서 기부 이후 절차를 고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관련 법과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통합·관리하는 별도의 팀이 꾸려져야 한다.
이재란=부처 간 협업이 필요한 이유다. 2012년 나눔 활성화를 위해 부처 간 정책을 협의·조정하고, 민간 전문가와 소통하기 시작한 ‘나눔활성화정책협의회’가 제도적으로 꾸준히 진행돼야 한다. 정부가 할 수 없지만 민간 차원에서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자율성을 주고 지원해야 할 것이다. 부처 간 소통, 민관 협력이 이뤄져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초고액 기부 시대가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