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지원 30년
토종 NGO의 힘
인도적지원 예산
연간 3000억원
민관협력 부문은 1%
튀르키예 대지진 발생 10개월. 강도7.8 지진으로 5만5000명이 사망하고 최소 1570만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현장도 이제 안정을 되찾고 있다. 지진 피해 지역에는 컨테이너 형태 임시 쉼터가 마련됐고, 정착촌 사람들은 주민자치위원회를 만들고 마을을 꾸려나가고 있다. 재난 현장에 누구보다 빠르게 진입했던 비영리 단체들은 지금도 현장을 지키며 이들의 일상 복귀를 돕고 있다.
긴급구호부터 재건, 회복과 예방에 이르는 이 모든 활동을 인도적 지원이라고 한다. 현재 임시거주촌에 아이들의 심리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여성친화공간(GFS)을 마련하는 일이나 보건소를 중심으로 위생 인식 개선 프로그램도 포함된다.
한 해 3000억원에 달하는 정부의 인도적 지원 예산 99%는 긴급구호에 쓰인다. 현지 정부와 UN 산하 국제기구로 전달되는 자금이다. 국내 비영리 단체도 동일한 재난 현장에 투입돼 인도적 지원을 벌이지만 재원은 공유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건 올 초부터다. 정부는 튀르키예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파견한 ‘해외긴급구호대(KDRT)’에 최초로 NGO를 포함시킨 이후 외교부와 국내 NGO 3곳이 1000만달러(약 130억원) 규모 기금을 공동으로 조성해 후속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제개발협력 전문가들은 “인도적 지원 분야의 민관협력 가능성이 열렸다”며 “내년도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이 6조5000억원으로 대폭 늘어나는 만큼 새로운 협력 모델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인도적 지원 민관협력 예산 5년째 제자리
정부의 인도적 지원 예산은 ODA 부문에서 나온다. 올해 기준 ODA 예산은 4조5000억원. 이 가운데 인도적 지원에 편성된 금액은 2993억6700억원(약 6.6%) 수준이다. 세부적으로는 ▲해외 긴급구호(2950억6100만원) ▲선진 인도적 지원 역량 강화(1억600만원) ▲인도적 지원 민관협력 프로그램(42억원) 등으로 구분된다.
문제는 인도적 지원 민관협력 프로그램에 편성된 예산은 5년째 42억원으로 그대로라는 점이다. 반면 외교부의 인도적 지원 예산은 2019년 861억원에서 2020년 1003억원, 2021년 1240억원, 2022년 2366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정부의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인도적 지원 예산 규모는 올해보다 2배 많은 7400억원이다. 민관협력 예산을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1% 수준에 불과하다.
ODA 예산은 국무총리실 소속 국제개발협력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다. 매년 6월 위원회에서 국제개발협력 정책·제도·추진 계획 등을 심의하고, 이를 반영한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서 의결되는 구조다. 올해 위원회에서 심의한 내년도 민관협력 예산은 200억원이다. 정부 예산안의 세부 내역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부 ODA 사업 관계자들은 민간 협력 부문 예산을 50억원가량으로 전망하고 있다.
박해성 굿네이버스 국제사업본부 지역개발팀장은 “튀르키예 이재민 임시거주촌 조성 사업에 편성된 올해 정부 예산 20억원이 내년도 예산으로 넘어가 사실상 신규 사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30억원에 불과하다”며 “관련 예산은 사실상 줄어든 셈”이라고 했다.
인도적 위기에 맞서는 비영리 소프트파워
인도적 지원 현장에는 비영리 단체가 가장 먼저 달려간다. 1994년 르완다 내전부터 2004년 남아시아 지진해일(쓰나미), 2010년 아이티 대지진, 2018년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과 올해 초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까지 늘 비영리 단체가 있었다. 글로벌 아동권리 전문 NGO 굿네이버스는 1993년 소말리아 내전 당시 긴급구호를 시작으로 지난 30년간 150회 넘는 인도적 지원 사업을 진행해 왔다.
이번 튀르키예 지진처럼 긴급구호 성격의 지원이 많지만, 난민캠프 지원이나 재난 대비 등 장기 사업도 인도적 지원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올해로 10년째 굿네이버스와 유엔난민기구(UNHCR)가 진행하는 난민 지원 사업이 대표적이다.
니제르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알카에다, ISIS(이슬람 국가), 보코하람 등의 주요 활동 무대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나이지리아와 말리 등 인접국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캠프로 유입된 인구만 70만명에 이른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면서 물가가 40% 치솟았다.
당장 구호품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개별 NGO들이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국내 NGO들은 자체 모금액으로 구호품을 보내고, 프로그램 위주의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굿네이버스는 2020년부터 직업 훈련 캠프를 설치해 청년들에게 컴퓨터, 재봉, 용접 등 다양한 분야의 산업 교육을 진행한다.
곽지형 굿네이버스 니제르 대표는 “직업 훈련이 전혀 안 된 청년들을 노동시장에서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교육도 경제적 자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도적 지원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위기 상황이 지속하면서 단기적으로 극복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교육과 훈련은 장기적으로 현지의 분쟁 위기를 감소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노르웨이, 인도적 지원 예산 절반 NGO에 쓴다”
해외 주요국에서는 NGO를 통한 인도적 지원이 활발하다. 긴급구호에 잔뼈가 굵은 NGO의 전문성과 현장 접근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에 따르면, 노르웨이는 인도적 지원 예산의 47.7%를 현지·글로벌 NGO에 집행한다. 네덜란드(35.0%), 스웨덴(32.9%), 캐나다(23.7%), 미국(20.3%) 등도 NGO 협력 비중이 높은 편이다. 한국은 0.6%로 하위권인 일본(4.1%)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진다. 인도적 지원 예산이 연간 1억달러(약 1300억원) 이상인 OECD 개발 원조 위원회(OECD DAC) 회원국 17곳 중 꼴찌다. 국제개발협력 전문가들은 OECD 평균인 19.9% 수준까지는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관협력 파트너로 NGO를 신뢰하는 이유는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 때문이다. 주요국들은 파트너십, 풀랫폼의 형태로 NGO와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 일본은 재팬플랫폼(JPF)을 활용해 NGO 단체들에 재정을 지원한다. JPF는 NGO·정부·기업·미디어 등이 파트너십을 형성해 자연재해, 국제 긴급 원조, 개발 협력 등의 효율을 높이는 국제 인도 지원 시스템이다. JPF에는 기업이나 국민을 대상으로 상시 모금한 원조 자금, 정부의 예산 등을 기금으로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다. 이 때문에 재난이 발생하면 NGO는 JPF에 있는 자금을 활용해 신속하게 구호활동에 뛰어들 수 있다.
캐나다 글로벌부(GAC)는 캐나다의 인도주의 비영리 기구 협의체인 ‘인도주의 대응 네트워크(HRN)’와 협력해 시민사회와 정보를 공유하고, 인도적 대응을 조정한다. 비영리 단체들의 조직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스웨덴 국제개발협력청(SIDA)은 전략적 파트너로 선정된 NGO와 최소 3년 이상 계약한다. 덕분에 긴 호흡으로 인도적 지원 현장 사업에 대한 자금 지원, 인도적 지원 정책과 수요 분석 등을 수행할 수 있다. SIDA의 전략적 파트너가 아니더라도 돌발 재난 상황에 협력할 방안이 마련돼 있다. 현지 재난 상황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적합한 기관을 발굴·지원해 예산이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박해성 팀장은 “하나의 사업을 기획·수행할 때 다양한 주체가 함께 참여하면 풍부한 아이디어와 인력을 확보하면서 사업의 질을 담보할 수 있듯이 NGO의 현지 네트워크, 전문 인력, 체계적인 조달 시스템은 인도적 지원 사업의 효과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제기구나 원조 대상국 정부에 인도적 지원 예산을 집행할 경우 예산 사용처와 효과성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국내 NGO들은 예산 사용 내역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투명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
김수연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