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 제조사의 임원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지난 수년간 너무 수주가 잘됐다. 모든 인력이 제품을 만들어 내는데 바빴다. 다른 걸 고민할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열심히 생산해서 팔고 돈을 벌었다. 그런데 문제는 돈 버는 기쁨에 그리고 제품을 만드는데 바빠 막상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제야 신기술 적용이나 디지털전환 등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헌재 전 부총리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한국의 산업에 대해 유사한 진단을 하셨다. “시장수요가 너무 빨리 우리에게 들이닥쳤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생산에 바빴다. 이러다 보니 하나씩 도전을 받으면서 문제를 풀어온 경제가 아니고 그냥 점프업한 경제가 됐다. 중간단계 고민의 과정이 없었다. 이것이 그 당시는 성공적이었는데 전환기의 끝에 오니 부담이 돼버렸다.”
현재가 너무 잘되면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시행착오를 통한 축적의 시간을 별로 갖기 어렵다. 기본적인 시간과 고난, 장애, 허들과 고통도 있어야 시행착오를 통해 실력과 역량이 축적된다. 그런데 너무 잘되면 그걸 쌓을 시간이 없다. 생산과 판매에만 집중하고 기본 역량을 축적하지 못한다.
둘째, 현재의 수요 공급에 매몰돼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 잘될 때 별도의 조직을 꾸려 차근히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하고 신기술 투자도 크게 해야 하는데 모든 조직이 현재 수요 대응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나빠질 때 그때 가서야 미래 대응을 부랴부랴 검토한다.
셋째,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라고 여긴다. 상황이 좋아서 잘되는 것을 자신의 실력이 좋아서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자만한다. 상승장에는 실력과 무관하게 웬만하면 대부분의 투자자가 돈을 번다.
얼마 전 한 벤처 CEO를 만난 적이 있다. 코로나 시기에 수요가 급증하여 단기적 성장만을 외쳤다. 큰 투자를 받고 많은 직원을 뽑았다. 역량을 쌓기보다는 찍어내듯 콘텐츠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수요가 영원히 갈 것으로 생각하고 코로나 이슈가 끝날 경우의 시나리오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 이슈가 끝나자 고객들은 떠났고 구조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개인의 삶도 유사하다. 과도하게 잘 풀리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고생도 하고, 좌절도 하고, 장애물도 만나면서 이를 극복하며 하나씩 하나씩 축적할 때, 오히려 겸손할 수 있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들은 현재 너무 잘된다고 해서 이를 실력으로 여기거나 영원히 갈 것으로 가정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슈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역으로 사업 상황이 어렵다면? 너무 실망할 필요 없다. 상황이 어려울 때 오히려 단단함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기름기를 다 빼고 핵심에 집중할 수 있다. 잘 버티기만 한다면 이후 도약할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리더들은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좋을 때는 겸손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나쁠 때는 본질에 집중하며 역량을 축적해 나간다. 이것이 바람직한 리더들의 자세가 아닐까 싶다.
신수정 KT엔터프라이즈 부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