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5일(목)

늦더라도 스스로 일어서도록… 기술 교육으로 저개발국 돕는다

변화하는 국제개발협력 현장
에이에이알재팬, 미얀마서 장애인 직업 교육
협동조합 모델 도입해 미용실·잡화점 등 운영
코이카·YMCA 등 동티모르서 빈곤 퇴치 사업
커피 가공장·카페 설립해 1년 만에 재정 자립
주민 간 불신… 공동체 교육 등 기반 마련해야

‘Tailor'(재단사)라고 쓰인 문틈 사이로 수북이 쌓인 헝겊들이 보였다. 울긋불긋한 지갑과 손가방, 옷가지 같은 것들이다. “미얀마는 ‘론지(Longyi·치마처럼 입는 미얀마의 전통의상)’ 같은 걸 직접 해 입어요. 봉제 옷감 수요가 많기 때문에 이 클래스의 인기가 가장 높아요.” 요사쿠 오시로(29·Yosaku Oshiro) ‘에이에이알 재팬(AAR·Association for Aid and Relief japan)’ 코디네이터의 설명이다.

지난달 28일 방문한 이곳은 14년 전 미얀마의 태풍 피해를 돕기 위해 ‘양곤(Yangon)’시(市)에 들어온 일본의 긴급구호단체다. 당시 미얀마의 많은 장애인이 직업 없이 살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아예 눌러앉아 미얀마 장애인의 직업교육을 펼치고 있다. 미용·재봉 교실에 2009년 컴퓨터 수업까지 추가하며, 지금까지 13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요사쿠 코디네이터는 “미얀마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낮고, 도로·건물 등의 접근성도 떨어져 열심히 일을 배워도 취업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드물었다”고 한다. 2010년 무렵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일본에서 좋은 성과를 보이던 ‘협동조합’ 모델을 들여오면서부터다. 이 단체는 직업 교육을 이수한 장애인들이 지역사회 안에 ‘셀프헬프그룹(SHG·자조모임)’을 만들게 하고, 그들의 욕구를 파악해 공간이나 인력,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했다. 총 18개의 마을 그룹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9개 그룹에서 현재 자신들만의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 요사쿠 코디네이터는 “장애인들이 모여 미용실을 오픈하기도 하고, 봉제업체나 잡화점을 차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①지난해 8월 동티모르 딜리시에 마련된 '피스커피'는 내국인들을 위한 최초의 카페다. ②톤즈의 주민들이 2년생 망고나무를 옮겨심고 있다. ③말라위 구물리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농산물 유통조합원들이 공동창고에서 옥수수 판매를 준비하고 있다. ④인도네시아 미낭까바우 마을에서 진행된 마을 사업설명회 현장. ⑤망고묘목, 망고는 키우는 데 7년이나 걸리지만, 이후 100년간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열매나눔인터내셔널ㆍ경희대학교 국제개발협력연구센터ㆍ희망고ㆍ팀앤팀 제공
①지난해 8월 동티모르 딜리시에 마련된 ‘피스커피’는 내국인들을 위한 최초의 카페다. ②톤즈의 주민들이 2년생 망고나무를 옮겨심고 있다. ③말라위 구물리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농산물 유통조합원들이 공동창고에서 옥수수 판매를 준비하고 있다. ④인도네시아 미낭까바우 마을에서 진행된 마을 사업설명회 현장. ⑤망고묘목, 망고는 키우는 데 7년이나 걸리지만, 이후 100년간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열매나눔인터내셔널ㆍ경희대학교 국제개발협력연구센터ㆍ희망고ㆍ팀앤팀 제공

◇국제개발협력, 사회적기업·협동조합을 만나다

국제개발협력의 현장이 달라지고 있다. 송진호 울산 YMCA 사무총장은 “지금까지는 원조 모델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지속가능한 사회적경제 모델을 적용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코이카(KOICA)·한국YMCA전국연맹·경희대학교가 2012년부터 동티모르에서 진행한 ‘커피공정무역 자립화를 통한 빈곤 퇴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커피 생산지인 동티모르 사메군 로또뚜 마을에 1차 커피 가공장을, 수도 딜리(Dili)시(市)에 2차 가공장과 카페를 만들어 이들을 잇는 순환구조를 구축했는데, 9개의 주민 소그룹이 결성돼 사업에 직접 참여했고, 지역 취약 계층 30여명의 고용도 이뤄졌다. 특히 지난해 8월, 딜리시에 생긴 카페 ‘피스커피(Peace Coffee)’는 내년부터 코이카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정적인 자립도 이뤄냈다. 사업에 참여했던 손혁상 경희대학교 공공대학원 교수는 “내수 수요를 확인한 만큼, 카페 체인점을 2~3군데 정도 늘려볼 계획”이라며 “외부의 자금 지원 없이 스스로 굴러가야 할 내년부터가 진정한 시험대”라고 말했다.

2011년부터 남수단 남톤즈 카운티(Tonj South County)와 파트너십을 맺고, 망고나무 묘목을 지원하고 있는 NGO ‘희망고’는 자립지원센터 ‘희망고빌리지’를 통해 남성직업교육학교(목공·건축), 여성직업교육학교(재봉)를 운영한다. 내년엔 남수단 정부와 함께 망고 가공공장을 건립해 지역민들의 고용과 수익 창출에 이바지할 예정이다. 정현정 희망고 사무국장은 “단기 성과를 볼 수 없는 사업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잃지 않으며 주민들의 참여도와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국제자립개발NGO ‘열매나눔인터내셔널’이 2012년부터 아프리카 말라위 구물리라 마을에서 펼치고 있는 ‘메이즈(maize·옥수수) 프로젝트’도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변곡점을 넘었다. 농산물 유통망이 부실해 피해를 입는 주민들에게 공동물류 창고를 지원하고, 주민 120가구가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하도록 하는 사업이다. 주민들은 농산물이 넉넉할 때 창고에 저장했다가 가격이 올라갈 때 파는 형태로 수익을 창출하고, 수익금으로 마을의 취약 계층을 돕거나, 지역 환경 개선에 사용하는 등 지역사회에도 기여한다.

◇개인주의와 불신, 서열 의식 등은 넘어서야 할 장벽

하지만 사회적경제 모델이 국제개발협력의 ‘만능키’ 역할을 하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실제로 저개발국에서 만들어지는 협동조합 모델의 상당수는 소액대출을 받기 위한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 조합으로, 주민들이 자발적·민주적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다. 2012년부터 인도네시아 빠당에서 자립마을협동조합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팀앤팀’의 길종훈 간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혼자 코코넛 기름을 짜고, 구멍가게를 열고, 바느질을 하는 등 동업·협력보다는 개인적으로 소규모 경제활동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이상진 열매나눔인터내셔널 국장은 “공동 소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간의 불신이 강하다”며 “민주적·자발적 참여를 이해시키는 데만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이어 “식민지를 오래 겪은 탓인지 서열 의식이 유독 강한데, 주민들은 마을 추장 눈치를 보고, 추장은 협동조합처럼 평등한 조직구조를 달가워하지 않으니 일의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아직은 비주류’, 장기 투자에 대한 의지와 맞춤형 전문가 양성 있어야

전문가들은 현지 지역민을 대상으로 공동체 교육을 하고, 주민 모임을 활성화시키는 등 사회적경제의 기반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게 좋다는 이유로 ‘조합을 만들면 돈을 준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기관도 있다”면서 “주민들 의지가 아니라 기관 의지로 설립한 것은 그게 무슨 형태든 ‘모래 위의 성’이 될 수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손혁상 교수는 “시장 친화적 조직을 만들어 현지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이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고, 성공 가능성도 희박하다”면서 “이제 NGO에서도 사회적기업과 국제개발협력을 모두 이해하는 맞춤형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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