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하트재단 도서관 환경 개선 프로젝트
함께 보고 공유하기 어려운 아이들 같은 책 읽고 소통하는 계기 마련돼
분류·검색체계 보완, 혼자 쉽게 책 찾아 “도서관이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 되길”
“어, 벽이 바뀌었네! 우와, 책장도 이제 벽 쪽에 붙어 있어!”
“바닥도 푹신푹신해진 것 같아요. 문도 이제 미는 걸로 바뀌었네?”
발을 더듬고, 손으로 조심스레 벽을 짚어가던 아이들이 책장 앞에 멈춰 섰다. 하얀 벽을 둘러 세워진 책장에는, 크기와 내용에 따라 줄 세워진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책 한 권마다, 큰 글씨로 쓰인 색인들이 ‘이름표’처럼 붙어 있다. 손가락으로도 읽을 수 있는, 점자화된 분류표다. 다닥다닥한 책장으로 가득했던 교실 중간은 널찍한 육각형 책상이 대신했다. 여기저기 섞여 있던 책들도 자리를 나누어, 독서 확대기가 놓인 문 쪽에는 일반 책들이, 손으로 닿을 높이의 낮은 서가에는 저시력 아이들을 위한 점자 책들이 자리 잡았다.
“바뀐 도서관에 와 보니, 마음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요!” 한 달에 많게는 10권까지도 책을 읽는다는 시각장애를 가진 도현(11)군은 연신 싱글벙글이다. “전집류 책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추리소설도 있으면 좋겠는데…. 책도 더 많아지겠죠?” 지난 14일 춘천 강원명진학교. 10년도 더 된 ‘낡은’ 도서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아이들
시각장애 아동에게 책은 ‘세상과 만나는 창구’다. 책 외에 다른 시각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 박홍식(43) 강원 명진학교 교장은 “시각장애 아동들은 정보 접근성이 낮아, 그만큼 책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했다. 그는 “시각장애 아이들끼리 함께 보고 공유하는 어떤 공통의 것을 가지기가 매우 힘든데, 아이들이 ‘같은 책’을 함께 읽고 ‘소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책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지금까지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다가가기 어려운 그대’였다. 분류나 검색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곳이 많아, 책을 찾아서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사서가 일일이 찾아주지 않는 한 손에 잡히는 곳에 있는 책을 읽어야만 했다. 음악 선생님이 꿈이라는 청주맹학교 5학년 차혜원(11)양은 “같은 반 친구 태희도 음악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해 둘이 같이 음악책도 읽고 얘기도 하고 싶은데, 사서 선생님이 없으면 책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고 했다. 좁은 서가 간격이나, 맞지 않는 조도(照度) 등 시각장애 아동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그 누구보다 ‘책’이 필요함에도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도서관 정비나 지원에 대한 논의는 전무했던 상황. 하트하트재단이 드디어 ‘지원군’으로 나섰다.
◇의료 지원에서 사회통합 위한 ‘도서관’ 지원까지
‘시각장애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더 큰 세상과 만나도록 할 수 있을까.’
8년째 시각장애 아동을 지원해 온 하트하트재단은 새로운 고민과 마주했다. 2006년 시각장애 아동 개안수술을 시작으로, 눈이 불편한 아이들에게 의료 기기나 독서 확대기 같은 학습 보조기를 지원해왔다. 장학금 지원도 이어졌다. 그러나 시각장애 아동 한 명 한 명에게 ‘장애의 불편함’을 덜어주고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상으로, 이들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길러내기 위한 시스템의 변화가 고민스러웠다. 손은경 하트하트재단 나눔기획팀 과장은 “시각장애 아이들에게도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미래에 대한 꿈, 사고력, 상상력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아이들이 책을 통해 더욱 넓은 세계, 더욱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선물하기 위해, 다양한 주체도 힘을 보탰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사업을 후원하고, 임직원들은 도서관 정비를 위한 봉사활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하드웨어’ 개조는 전문 인테리어 업체에서 맡고, ‘도서관’으로 기능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는 연세대 문헌정보학과에서 손보기로 했다. 공모를 통해, 전국 12개 맹학교 중 청주맹학교와 강원 명진학교 두 곳이 선정됐다. 도서관 너비, 책장 높이, 장서들의 평균 사이즈에 대한 실측이 이어졌다. 고려해야 할 시각장애 아동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한 실무 논의도 수차례 열렸다. 도서 목록을 만들고, 분류 라벨을 붙이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지루한’ 과정도 뒤따랐다.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최적화된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도서관 공사도 계속됐다. 드디어 지난 14일, 4개월여에 걸친 대대적인 ‘개조’를 마치고 ‘안팎’으로 새로워진 도서관이 아이들에게 선보였다.
◇더 넓은 세상을 선물 받다
아이들이 선물 받은 건 환해지고 깨끗해진 ‘공간’만은 아니었다. 아이들 앞에, 책으로 연결된 ‘더 넓은 세상’이 열렸다. 박은지 청주맹학교 교사는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분류 작업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겠다’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며 “본인들 스스로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 읽어가며 더 많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 도서관을 새롭게 구축한 이지연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2002년부터 교육부와 함께 학교 도서관 1만여개곳을 지원해왔는데, 이번 도서관이야말로 책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도서관이 친구들,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용재오닐이예요? 저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게 꿈인데…. 이제부터 용재오닐이랑 같이 연주하는 게 제 꿈이에요!” 이날, 도서관 한쪽에서, 독서 확대기로 책자를 넘겨보던 도현군에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춘천=김경하·주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