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CSR 보고서 현황과 나아갈 방향
30곳 중 18곳만 CSR보고서 발간
부패 등 부정적 사항은 축소·은폐
“작성 기준과 이해관계자 참여 절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에 대한 국제 표준인 ISO 26000이 오는 11월 1일 발표된다. 2004년 9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 표준 개발을 목표로 조직된 실무 그룹(Working Group)이 연구를 시작한 지 6년 만이다. 국제 표준 제정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현존하는 이 시대 최고의 비즈니스 구루(정신적 스승)로 존경받는 필립 코틀러 박사 역시 그의 저서 ‘마켓 3.0’을 통해 오늘날 기업은 ‘더 나은 세상 만들기’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며 사회적 책임, 환경적 책임을 거듭 강조한다.
CSR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CSR 관련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보고서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환경보고서, 환경사회보고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등의 이름으로 발간된 CSR 보고서는 지난해에만 전 세계 3700여개에 달한다. 1990년대까지는 주로 환경책임경영을 다루는 ‘환경보고서’가 대부분을 이루었지만, 2000년대부터는 경제, 환경, 사회의 3개 주제를 다루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와 노동, 인권, 지역사회 등의 내용까지 모두 포괄하는 ‘CSR 보고서’가 주를 이룬다.
최근에는 재무 정보를 담는 연례보고서와 CSR 보고서를 통합해 하나의 보고서 안에 기업 경영 활동과 사회적 책임 활동을 모두 소개하는 ‘통합형’ 보고서도 늘어나는 추세다. 2004년부터 등장한 통합형 보고서는 작년 한 해 전 세계 190여개 기업에서 발간했다.
이에 ISO 26000 발표를 앞두고 조선일보 ‘더나은미래’ 팀은 지속가능경영 컨설팅, 공익 연계 마케팅 전문 컨설팅업체인 ‘CS컨설팅&미디어’와 함께 30대 기업 대상으로 CSR 보고서 현황 및 트렌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한국 30대 기업 중 한 번이라도 CSR 보고서를 발간한 기업은 18곳에 불과했다. 절반을 겨우 넘긴 성적이다. 16곳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형태로, 다른 2곳은 각각 ‘환경사회보고서’와 ‘사회책임보고서’ 형태로 발간했다.
아직까지 관계자들은 CSR 보고서를 발간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내지 사회적 책임 경영 마인드를 칭찬할 만하다고 입을 모은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 박태진(57) 원장은 “기업 입장에서는 온실가스 배출량, 재해율 등 숨기고 싶은 정보 및 부족한 부분들을 이해관계자들에게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CSR 보고서를 발간하는 것만으로도 기업에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CSR 보고서는 기업의 부족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선순환 시스템 구축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나은미래’ 팀과 ‘CS컨설팅&미디어’가 국내에서 발간된 보고서들을 심층 분석해본 결과, 아직까지는 그런 ‘선순환’의 고리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발간하고 있는 CSR 보고서 대부분이 ‘잘 하고 있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부족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경우 또는 현재 활동 정보를 숨기고 싶은 경우, CSR 보고서 내 그러한 이슈 자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애매한 표현으로 무마하는 기업이 상당수였다.
예를 들어 ‘부패사건에 대한 조치’ 항목의 경우, CSR 보고서를 발간하는 18곳 중 기아자동차 한 곳만이 공정거래위원회 징계건수를 표기하고 있었다. 나머지 기업들은 실질적 정보 없이 ‘부패를 없애야 한다’는 당위적 내용의 자체 윤리강령을 명기했을 뿐이다.
카이스트 사회책임경영연구센터의 안병훈(63) 원장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면서 부족함 또는 잘못을 인정할 때 오히려 보고서의 신뢰도가 높아진다”며 CSR 보고서의 내실을 강조했다. “CSR 보고서가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러한 정보에 기초해 CSR 활동을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는 국제적 기준이나 규범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기업 내부에서도 최근 CSR 보고서에 ‘잘 하는 활동’만 명시하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이해관계자와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SK에너지, 삼성전자 등 13곳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을 통해 중요도 테스트를 수행하고 있다.
포스코 사회공헌팀 방미정(42) 차장은 “지속가능경영 개념 자체가 주주뿐 아니라 투자자, 소비자, 지역사회, 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관련된 이슈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해관계자 포럼을 거치면서 실제 기업의 장·단점이나 보완해야 할 CSR 영역 등이 드러나기 때문에 CSR 활동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이해관계자들이 직접 보고서 검증도 한다. 환경경영팀 정인모(47) 부장은 “기업의 부족한 부분을 공개한다는 것이 어려웠지만, 공개를 하니 오히려 곪은 상처가 낫더라”며 이해관계자 참여의 의의를 거듭 강조했다.
공익비즈니스 컨설팅업체인 플랜엠의 김기룡(32) 대표는 “CSR 보고서 발간 자체도 물론 큰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발간 자체를 넘어 질적 성장과 보고서를 통한 소통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며 “내실 있는 CSR 보고서를 통해 책임 있는 경영, 책임 있는 투자, 책임 있는 소비가 촉진되길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오혜정·류정화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