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수)

청년 농부는 누린다,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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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나은미래×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공동기획
[농촌으로 간 청년들]
①농부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데요

귀농·귀촌 선택한 2030세대
“생태적, 공동체적 가치 추구”

자연 리듬대로 돌아가는 농촌
비오는 날은 ‘강제 연차’
농한기에는 ‘장기 휴가’

도시를 벗어나 농촌으로 향하는 2030이 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귀촌한 39세 이하 가구주는 총 1362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농촌으로 간 청년들은 농사를 짓고, 가게를 열고, 커뮤니티를 꾸리며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녹아들어 간다. 농촌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청년들의 일상과 그들의 역동성으로 달라지는 농촌의 풍경을 소개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경남 진주에서 2년째 대추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는 박지현(26)씨. 손바닥 위에 직접 그린 토마토 캐릭터 ‘힙토(HIPTO)’를 올려 편집한 사진을 보내왔다. 하루 2~3시간씩 밭일을 하고 저녁에는 힙토를 소재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한다. /박지현씨 제공

경남 함안에서 블루베리 농장을 운영하는 이상엽(35)씨는 2016년 귀농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종합상사와 사회적기업, 외국계 해운 물류 회사 등에서 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울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주어진 공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붐비는 대중교통, 네모난 칸막이에 둘러싸인 사무실 책상이 숨이 막혔다. 서울 생활을 접고 부모님이 계신 농촌으로 내려왔더니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몸도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소비도 줄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옷을 10벌 샀다면 농촌에서는 1벌로 충분했다. 소비를 줄이니 환경보호를 진정성 있게 실천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며 “농촌에서 가치관에 맞게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귀농·귀촌은 주로 은퇴한 50~60대의 선택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을 끝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마치 ‘순서’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최근 이런 통념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 청년이 늘고 있다. 자신의 가치관대로 삶을 펼칠 수 있는 무대를 꿈꾸며 농촌으로 향한다. 농촌진흥청이 2014~2018년 1039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귀농·귀촌인 정착실태 장기추적조사’ 결과 2030세대는 귀농·귀촌의 동기로 ‘생태적,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대안적 삶을 원해서’를 가장 많이 꼽았다. 반면 40대 이상은 ‘은퇴 후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서’를 택했다.

뜻밖의 ‘워라밸’

경남 진주에서 대추방울토마토를 재배하는 박지현(26)씨는 2년 차 농사꾼이다. 허리, 무릎 안 쑤시는 곳이 없어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다닌다. 박씨는 “500평 밭에서 토마토 곁가지를 잘라주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2~3시간이 훌쩍 간다”면서 “몸은 고되지만 희한하게 머릿속은 맑고 편안하다”고 했다. 토마토가 쑥쑥 잘 자랐을 때의 성취감은 무엇보다도 크다. 박씨는 “토마토들이 잘 자랄 때는 하우스 안에 들어가자마자 공기가 다른 게 느껴진다”며 “숨 쉬는 것부터 편하다”고 했다. “그럴 때 진짜 재밌죠. 근데 토마토들이 병들면 공기부터 탁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요. 농장 안에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답니다.”

농촌에는 출퇴근 시간이 없다. 오로지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모든 시계가 돌아간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이 있는 삶’이 당연하게 주어진다. 비가 오는 날은 논밭으로 나갈 수 없으니 ‘강제 연차’를 써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해서 일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물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농한기’가 찾아온다. 이때는 잠시 쉬어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일반 직장을 다니면서는 꿈꾸기 어려운 ‘장기 휴가’다.

장슬기 청년여성농업인협동조합 회장은 “지역에 따라 날씨도 다르고 기르는 작물도 다른 데다 농부마다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바쁠 수도 있고 여유 있게 보낼 수도 있는 게 농촌의 삶”이라고 말했다.

촌 청년들은 외지인이 직접 농사를 지어볼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논밭상점의 ‘공유논밭’ 참가자가 밭에서 딴 허브로 만든 모히토를 찍고 있다. /논밭상점 제공

영화나 책을 보고 친구들을 만나며 느긋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모하는 사람도 있다. 박지현씨는 직접 그린 토마토 캐릭터 ‘힙토(HIPTO)’로 그립톡, 스티커 등 각종 굿즈를 만들어 판매한다. 농사와 음악·미술을 결합한 전시를 진주 시내에서 열기도 했다. 박씨는 “농촌에서 살면 지루하지 않으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나름 엄청 바쁘다”며 웃었다.

농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청년들은 허브, 과일 등 직접 농장에서 기른 작물로 만든 음료를 파는 카페를 만들거나 외지인에게 농사를 경험하게 하는 체험 농장을 꾸린다. 2030세대의 방식으로 온라인 판로를 개척해 마을 경제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충남 홍성에서 유기농 허브를 재배하는 박푸른들(32)씨는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하는 온라인 사이트 ‘논밭상점’을 만들었다. ‘당일 생산, 당일 발송’을 원칙으로 농산물 40여 종을 판다. 농협, 도매상 등 기존에 거치던 유통 단계를 건너뛰고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이다. 박씨는 “농촌을 지키는 건 하루하루 성실하게 작물을 재배하는 보통의 농민들”이라며 “우리 같은 청년들이 농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역할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농촌이 촌스럽다니요?

농촌의 청년들이 꼭 농사를 짓는 건 아니다. 못 쓰게 된 여관을 개조해 새로운 콘셉트의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가 하면, 농촌의 풍경을 담는 사진작가로 일하기도 한다. 마을에 없는 서비스, 예컨대 사진관이나 이색 카페를 열기도 한다. 시공간의 제약이 적은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황민아(31)씨는 전주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다가 2년 전 겨울 충남 홍성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직업은 여러 개다. 공예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며 강사, 유튜버이기도 하다. 의뢰가 들어올 때마다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일주일에 1~2번은 주변의 작은 학교에 방과 후 수업 강사로 나가서 공예 수업을 한다. 집 마당의 작은 텃밭에서는 감자·깻잎·고추 등을 기르면서 시골의 한적한 일상을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다. 황씨는 “도시에서는 사계절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일을 하면서도 꽃이 피고 지는 걸 보며 자연을 흠뻑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농촌에서 자리 잡은 청년들은 더 많은 청년을 농촌으로 불러 모은다. 도시에 사는 청년에게 농촌 생활의 재미와 가치를 알리기 위한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주말에만 와서 쉴 수 있는 1박2일 프로그램부터 한 달 살기, 귀농 전 농사가 적성에 맞는지 미리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청년에게 농촌의 삶을 소개하는 책을 내기도 한다. 강원 화천의 송주희(32)씨는 지역 청년 14명과 농촌에 온 이유와 농촌에서의 생활을 담은 에세이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송씨는 “농촌에 온 청년들이 꼭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고 사진작가, 목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며 “여러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농촌이 지루하고 뒤처졌다는 건 옛말이 됐다. 청년들의 활동은 농촌에 대한 인식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국책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이지현(34·충북 괴산)씨는 5년 전 귀농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시골 내려가 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농사를 짓겠다는데 왜 다들 아깝다고 말하는지 이상했다”면서 “농부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농업이 얼마나 가치 있고 도덕적인 행위인지 사람들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표고버섯 재배로 귀농 생활을 시작한 그는 ‘뭐하농’이라는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해 사람들에게 농업의 즐거움을 일깨우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농촌의 가치와 미래를 토론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뭐하농하우스’라는 모임 공간을 마련했고, 내년에는 농촌의 가치를 알리는 매거진도 낼 계획이다. 송미령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년은 존재만으로도 농촌에 활력을 줄 뿐 아니라 젊은 관점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며 “정부가 청년들이 농촌에 정착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은 더나은미래 기자 bloomy@chosun.com

<글 싣는 순서>
①농부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데요
②할머니, 제 나이를 묻지 마세요
③[농촌 청년 좌담회] 이런 정책 왜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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