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낭만이 없어졌군요.”
성수동의 과거 분위기를 잘 아는 어느 지인이 대화 중에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최근 금융시장이 요동치면서 성수동도 그 파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적·경제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소셜벤처들과 임팩트 투자 생태계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낭만의 시대가 저문 거죠’라고 말했지만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성수동을, 우리가 하는 일을, 낭만이라 생각한 적이 었었던가를 떠올리면서.
낭만.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낭만이라는 단어 뜻을 검색해봤다. 임팩트투자사와 소셜벤처, 시민사회단체 등 사회 혁신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들이 성수동에 터를 잡은 지 7년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성수동은 현대식 마천루가 즐비하고 각기 다른 디자인과 매력을 뽐내는 크고 작은 식당과 편집 매장이 골목마다 들어선 곳이 되었다. 나날이 높이를 더해가는 성수동 빌딩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이상은 얼마나 쌓여가는지를 생각한다.
성수동을 대표하는 기관 중 상당수는 설립 10주년을 맞이하거나 이미 20주년을 바라보고 있다. 2008년에 설립한 소풍 역시 성수동에 터 잡은 지 7년째이자, 설립 13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그간 텀블벅, 스페이스클라우드, 동구밭, 비플러스, 자란다, 스티비, 뉴닉 등 국내를 대표하는 소셜벤처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임팩트투자 생태계도 몰라보게 커졌다. 2018년도부터 연간 2000억원 규모의 투자 조합을 계속 결성해내며 총액만 해도 1조원을 내다보는 시대가 되었다. 그 사이 협력보다는 경쟁이, 연대보다는 자기 증명이 더 중요해졌다.
축적하는 경험, 양적 규모는 늘어나고 있지만, 세상은 어찌 된 일인지 뒷걸음질하는 것 같다. 굳이 코로나19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세대 간, 계층 간,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는 도무지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성수동에서도 그 격차는 그대로 반영된다. 영리와 비영리, 투자사와 비투자사, 자본가와 비자본가는 뚜렷이 구분된다. 오랜 시간 성수동 소셜밸리라는 터를 가꿔온 사람들을 만나면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이해를 풀어내기 바쁘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눈 건 오래전 같다.
며칠 전, 이젠 성수동 임차료가 너무 올라서 도저히 사무실을 유지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창업자를 만났다. 애석했다. 투자를 수십억 원 유치하는 등 가파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팀도 만났다. 기뻤다. 수백억원 규모의 임팩트 투자 조합을 결성한 동료 투자 기관을 보고 있노라면 희망에 부풀었다가, 아직 초기 단계지만 문제 해결 역량이 돋보이는 동료들이 똘똘 뭉쳐있는 팀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힘차게 쥔다. 그러다 임팩트 투자에서 소외된 비영리나 기관 대표님들을 만나는 날엔 고민을 한가득 안고 돌아온다.
성수동은 복잡하고 세상도 복잡하다.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져서 과거와 같이 문제의식을 함께 지니거나, 절대 악을 하나 상정하고 해결해나가는 접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생각도, 접근 방식도 다른 우리가 이곳 성수동에서 각자의 미래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