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난립하는 CSR 지표… 사회적 임팩트 측정하는 평가 기준 필요

CSR 평가제도 90여개…
한 기업이 38곳 중복 수상, 1위 선정된 기업도 갸우뚱
불명확한 기준·잣대에 자체 평가하는 기관도
CSR 평가 지표 대안은

“최근 이름 모를 기관에서 우리 기업을 CSR 1위 기업으로 선정했더라. 공인된 평가 지표가 아니기 때문에 CEO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수능도 인문계, 자연계로 나눠지는 것처럼, 기업도 규모와 특성에 따라 CSR 상황이 다르다.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면 안된다.”(P기업 CSR팀 관계자)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이를 평가하는 각종 CSR 지표가 쏟아지고 있다. ‘상생’ ‘윤리경영’ ‘사회적 책임’ 등 공익 관련 키워드가 증폭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은 “사회공헌 활동의 성과를 평가할 체계가 필요하긴 하나, 공신력 있는 CSR지표가 없다보니 대체 어떤 CSR 지표를 따라야 하는지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난립하는 CSR 지표

현재 정부, 언론, 협회 등 각 기관이 진행하는 CSR 평가제도는 90여개에 달한다. 2010년 각 기관이 실시한 CSR 관련 시상식은 총 81개. 그중 한 기업이 무려 38개를 중복 수상했다.

‘사회공헌 대상’을 여러 번 수상한 한 기업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 또는 일반인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 평가 절차에서 생략돼있고, 평가 기간이 3일 정도로 짧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전문가와 일반인 약 6만명이 평가 과정에 참여하고, 최소 두 달에 걸쳐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자 자체적으로 CSR 지표를 개발해 이를 평가에 반영하는 기관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 1월, 서울시는 “CSR을 지수화한 평가지표를 만들어, 이를 시가 발주하는 사업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사업자 선정시 CSR 점수가 높은 기업을 우대하고, 점수가 낮은 기업에는 감점을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 사회적책임경영 포털’을 오픈하고, 중소기업들이 자체적으로 CSR을 진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금융권에서도 사회적책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별도의 지표를 만들어, 이를 금융회사의 경영평가 때 반영할 계획이다. 전국은행연합회, 여신금융협회, 생명·손해보험협회 등 금융협회들은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금융회사에 적합한 CSR 지표를 연구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2월 18일, ‘로펌 공익활동 평가지표’를 발표했다. 변호사의 봉사활동 시간, 공익전담 변호사 설치 여부, 기부 현황 등 총 28개의 평가 항목으로 구성했다. 이 지표를 바탕으로 대한변호사협회는 매년 개인 및 단체 부문 ‘공익인권상’을 수여하게 된다.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기업의 규모, 업종, 특성을 고려한 CSR 지표가 개발돼왔다. 지난 2006년 IBM, 소니, 필립스 등 22개 글로벌 대기업들은 통일된 CSR 지표를 발표하고, 협력업체와의 계약시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상_그래픽_CSR_지표_2013

◇사회적 임팩트 측정하는 CSR 연구 이뤄져야

하지만 국제표준을 택하는 해외 글로벌기업과 달리, 국내기업 위주의 자체 평가는 공정성이나 신뢰성을 부여받기 어렵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2010년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사회적 책임 국제표준 ISO 26000을 채택했다. 인권, 노동, 환경, 소비자 이슈, 공정거래 관행, 지역사회 공헌, 지배구조 등 7가지 분야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실행지침과 권고사항 등을 담은 것이다.

2005년부터 5년간 추진돼온 이 기준은 2010년 9월 77개 개발 참여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93%의 찬성을 얻어 국제표준으로 최종결정된 바 있다. 원래 ISO 26000은 인증제를 채택한 기존의 ISO제도와 달리, 사회책임경영의 ‘가이드라인’ 구실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ISO 26000 인증을 받으면서 사회적 책임 기업의 자격요건이 되는 분위기다.

앞으로 국가 간 신(新)무역장벽이 될 가능성도 높다. 이에 따라 글로벌 기업의 경우 매출·영업이익·순이익 등 재무적인 상황은 물론, 환경·지배구조·인권 등 비재무적인 정보를 함께 ‘통합보고(Integrated Reporting)’하는 곳도 늘고 있다. 김기룡 플랜엠 대표는 “사회공헌 예산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프로젝트라 말할 순 없다”면서 “기업의 규모, 형태, 특성별로 세밀한 CSR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임팩트를 측정하는 CSR 평가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사회적 가치’와 ‘파급 효과’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빌게이츠재단은 오래전부터 미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왔다.

재단은 미국 이글카운티 학교를 대상으로 교사의 업무 성과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 및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에서 답을 찾았다. 이글카운티 교사 470명은 전문 평가사로부터 매년 3차례, 교장 및 멘토 교사로부터 최소 9차례씩 수업 관찰 및 평가를 받았다.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평가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의 시험 성적과 설문조사 점수도 지표에 포함시켰다.

단순히 교사를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교사들이 자신의 강점을 찾고 강화할 수 있도록 일대일 코치를 지원했다. 멘토 교사와 교장들이 매주 회의를 주재해, 교사들끼리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회도 마련했다. 교사들은 수업 관찰 평가와 학생 성취도에 기반해 연봉 인상 및 보너스를 받았다.

처음에는 평가 자체에 회의적이던 교사들도 수준 높은 피드백 시스템을 경험한 후 달라졌다.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더 좋은 수업 내용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 지난 5년간 이글카운티 학생들의 성적은 꾸준히 향상됐다.

빌 게이츠는 지난 1월 29일 월스트리트저널에 해당 사례를 소개하면서 “인류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데 정확한 측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관찰했다”면서 “혁신적인 서비스를 필요한 곳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혁신적인 측정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형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이 단기 성과에 집중하면, CSR의 사회적 파급력을 측정할 수 없다”면서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부터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긴 호흡으로 사회적 임팩트를 측정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정소희 인턴기자
김명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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