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모든 ‘사회적가치’를 팝니다”

[Cover Story] 3년 만에 매출 240억원 달성, 경북사회적기업종합상사협동조합

경북상사 사무실에서 만난 직원들이 활짝 웃고 있다. 2015년 설립 당시엔 상사 설립 추진단장이던 이원찬 이사가 유일한 상근직원이었지만, 지금은 무역·회계 등 분야 전문성을 갖춘 직원 14명이 함께 일하는 번듯한 회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주=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무엇이든 판다.”

무역 거간꾼으로 불리는 ‘상사맨’들의 제1 신조다. 뛰어난 상사맨을 두고 “아프리카에 난로를,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판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지난 2014년 인기를 끈 드라마 미생의 주무대도 종합상사였다. 스타킹부터 철강까지 고객사가 원하는 제품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사맨들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경상북도 경주에는 조금 특별한 종합상사가 있다. 판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뛴다는 점에선 여느 상사와 같지만, 이후의 과정은 좀 다르다. 판매 계약이 완료되면 상사는 공급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는데, 이 수수료를 1~5% 사이에서 내고 싶은 만큼 ‘알아서’ 내게 한다는 점이다. 또 공급업체의 수수료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발주처와 직접 계약을 권하기도 한다. 이 ‘별난 상사’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사회적기업’ 제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최초 사회적기업 전문 종합상사인 ‘경북사회적기업종합상사협동조합'(이하 ‘경북상사’) 얘기다.

“경북상사 통하면 믿을 수 있다” 입소문

지난 4일 경주시 황오동에 있는 경북상사를 방문했다. 경북상사는 상근직원 14명으로 이뤄진 작은 회사다. 보통 종합상사는 대기업이 운영하지만 경북상사는 ▲행정지원팀 ▲대외협력팀 ▲청년일자리팀 등 세 팀이 전부다. 규모는 작아도 소화하는 일은 대기업 못지않다. 경북 지역 공공기관·공기업과의 협력 사업이나 공공구매 진출 상황을 관리하면서 새로운 판로를 찾아내고(행정지원팀), 사회적기업들과 소통하며 제품의 질이나 서비스를 개선하면서(대외협력팀), 경북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길 원하는 청년 구직자와 사회적기업을 연결하는 일(청년일자리팀)까지 한다.

이날도 상사맨들은 분주했다. 칸막이가 쳐진 책상마다 서류가 높이 쌓여 있고, 모두 전화를 받거나 서류작업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3개의 회의실은 찾아오는 손님들로 비는 틈이 없었다. 미팅 하나가 끝나면 금세 또 다른 미팅이 시작됐다. 권문정 대외협력팀장은 “사회적기업들을 만나 제품이나 서비스 경쟁력과 개선점을 파악하고 어떤 공공구매 수요가 있는지 알아야 해서 미팅이 많다”고 했다. 사무실 밖에서 뛰는 직원들도 있다. 공공기관을 직접 방문해 영업활동을 하는 조합원들을 ‘청년상사맨’이라고 부르는데 영주·포항 등 경북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처음부터 경북상사에 이렇게 활기가 넘쳤던 건 아니다. 설립 당시인 2015년에 상근직원이라고는 이원찬 이사 1명이었다. 이원찬 이사는 맨땅에 헤딩하듯 만든 상사가 정말 매출을 낼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직원을 더 뽑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혼자서 행정, 자료 정리, 회계 처리까지 전담했다.

경북 지역에서 사회적기업 전문 상사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 건 2010년이다. 활동을 시작하기까지 5년이나 걸린 셈이다. 상사 설립을 이끈 박철훈 지역과소셜비즈니스 이사는 “당시 사회적기업 대부분이 영세했고 ‘사회적기업 전문 상사’라는 모델 자체가 처음이라 선뜻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했다. 탄력이 붙은 건 2014년 고용노동부가 주관한 일자리 경진대회에서 이 모델이 사회적기업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다. 지자체나 지역 사회적기업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당장 제품을 납품할 수 있는 제조업 사회적기업 85곳과 중간지원조직 10곳이 힘을 합쳐 출자금 1억7000만원을 모아 영업을 시작했다.

경북상사 직원들이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회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직원 각자가 가진 정보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나누는 활발한 소통 문화가 우리 상사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김종연 C영상미디어 기자

상사 문을 연 후에도 여전히 벽은 높았다. 힘을 모아 그동안 막혀 있던 사회적기업 제품 판로를 뚫자고 상사를 만들었는데, 주 타깃이던 공공구매 시장에는 진입조차 힘들었다. ‘사회적기업 제품은 질이 낮다’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제품 종류도 다양하지 못했고 포장 상태가 불량한 경우도 많았다. 환불·반품이 어렵고 판매처마다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 것도 문제였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상품성과 위기관리 능력을 키워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포장이 엉성해 한 공공기관에 납품했던 제품 대부분이 박스가 뜯어지고 내용물이 구겨진 상태로 배송된 적이 있었어요. 그 공공기관은 ‘사회적기업이니 반품 등 책임은 묻지 않겠지만 다신 구매하지 않겠다’며 냉랭한 태도를 보였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방문해 사과하고 상품 회수 없이 전량 환불했습니다. 기업에도 바로 알려 포장 개선에 나섰습니다. 그 공공기관은 지금까지 꾸준한 단골이 돼주고 있습니다.” 이원찬 이사가 설명했다. 이후 공공기관들 사이에서 ‘경북상사를 통하면 믿을 수 있다’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2017년 정부가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국정 과제로 내걸고 공공기관·공기업 경영평가에서 사회적가치 창출을 중시하면서 또 한 번 기회가 왔다. 사회적기업 공공구매로 가점을 노리는 공공기관들이 연이어 경북상사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공공구매·신사업 발굴… 전방위적 활동

종합상사 활동은 ▲공공구매 시장 진입 ▲온· 오프라인 판매 채널 적극 활용 ▲기업이나 공공과의 신사업 발굴 ▲금융 등 지원제도 확립 등 전방위적으로 진행된다. 경북상사가 취급하는 품목은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자는 것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스테이플러, 테이프 등 사무용품부터 케이터링, 이벤트 대행까지 가능하다.

경북 지역 공공구매를 줄줄 욀 정도로 통달한 상사맨들은 직접 공공기관을 찾아다니며 판촉과 홍보 활동을 한다. 공공기관 담당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사회적기업 제품 구매가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정확한 회계처리가 가능한지’ 등을 꼼꼼히 챙긴다. 경북상사 직원들은 직접 만든 공공기관 우선구매 정책안내서와 상품안내서를 들고 다니면서 보유한 품목과 사회적기업 제품 구매 절차, 구매 시 기관에 돌아가는 혜택까지 설명한다.

지자체나 공공기관, 기업과 MOU를 맺으면서 신규 사업을 만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성사시킨 MOU만 16개. ‘경북형 소셜관광’ 사업은 코레일과 MOU를 맺어 진행한 사업이다. 음식·숙박 분야의 35개 회원사가 연대해 ‘포아시스투어’라는 전담 여행사를 꾸렸고, 코레일의 폐역사(廢驛舍)를 이용한 관광사업의 우선 사업권을 땄다. 신한은행과는 사회적기업 대상 금융지원 MOU를 체결했다. 도내 신한은행 어디서나 사회적기업에 정책금융 상담을 제공하며, 대출 이율을 최소한으로 하는 ‘지정은행제’ 협약도 맺었다. 경북우정국과도 MOU를 맺었다. 온라인 우체국쇼핑몰에 사회적기업 제품 280개를 입점시켰는데 여기서만 연평균 13억원에 이르는 매출이 나온다.

상사를 투명하고 수평적으로 운영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 위해 특별한 조직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300만원부터 6000만원까지 조합사마다 달랐던 출자 금액을 기업당 10만원으로 통일했다.

이원찬 이사는 “출자금 부담을 낮춰 더 많은 사회적기업이 상사에 참여하고 모든 회원사가 동등한 1표를 갖도록 해 ‘수평적 협력’이라는 상사 설립 목적을 지켜냈다”면서 “출자를 많이 한 조합사가 상사 활동으로 생겨난 이익을 독점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사회적경제 험지 경북을 사회적경제 선두주자로

정부의 사회적경제 육성책과 상사의 전문성·투명성이 시너지를 내면서 매출은 급상승했다. 2015년 8000만원이던 매출액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2016년 46억원으로 뛰어올랐고, 지난해엔 240억원까지 치솟았다. 3년 만에 매출이 300배 뛴 것이다.

경북상사의 성공은 ‘사회적경제의 험지’로 알려졌던 경북이 국내 사회적경제를 선도하는 지자체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소멸위기 지역’ 순위 상위권에 늘 이름을 올리던 경북이 경북상사 활동으로 사회적경제 선진지로 알려지자 지자체도 지원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2018년 8억원에 불과하던 경북 사회적경제 활성화 예산은 올해 100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2월엔 ▲공공기관 우선구매 확대 ▲온·오프라인 판매 지원 ▲공동 브랜드 육성 등을 골자로 하는 ‘경상북도 사회적경제 활성화 7대 전략’도 발표했는데, 이 전략도 경북상사를 중심으로 한 현장 조직과의 협의를 거쳐 세워졌다.

경북상사의 성공은 전국 곳곳에서 사회적경제 종합상사 열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현재 전국에 사회적기업 전문 종합상사는 대구, 강원 등을 포함해 9개 지역에 이미 설립됐고 제주도, 충청북도 5개 지역에서 연내 완료를 목표로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매출 안정화를 이룬 경북상사의 다음 목표는 ‘더 많은 사회적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유통하는 제품 포장재를 통일해 스티커나 박스, 플라스틱 등 포장재로 인한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고객의 합리적인 불만사항에 3회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사회적기업에 벌칙을 주는 ‘고객 불만 책임 대응제’ 도입도 논의 중이다. 이원찬 이사는 “상사를 만들고 매출액을 높이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뛴 이유는 사회적기업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며 “이제 그 결실을 지역사회에 돌려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경주=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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