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선진국형 입양 제도로 뿌리찾기 쉬워져요”

입양특례법이 바뀌었다, 비밀입양은 이제 없다
친부모는 반드시 출생신고 일주일 숙려기간 거쳐야
국내입양 우선 추진하고 양부모 자격심사도 강화
입양 정책 정착 위해선 사회 인식 변화 중요해

“나에 관한 정보인데, 당사자인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화가 났어요.”

지난 6일 서울 시청역 인근 국제한국입양인봉사회 인카스(InkAS) 사무실에서 만난 그레이스(가명·28)씨는 3년 전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레이스씨는 2009년 처음 한국에 왔다. 해외입양인들의 한국 방문과 정착을 지원하는 (사)해외입양인연대의 가족 찾기 여행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한국의 입양기관에서 넘어온 자료에 친생모의 이름이 남아있다”는 소식에,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왔다.

“저는 생후 4개월 만에 미국 켄터키주로 입양됐어요. 백인 중산층 부모님에다, 백인들만 다니는 사립학교를 나왔죠. 나만 유일한 동양인이고,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내가 태어나던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궁금했어요. 열아홉 살 때 양부모님이 한국 여행을 보내주려고 했는데, 그때는 제가 ‘한국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어요. 버려진 아이였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힘들었거든요. 스물여섯 살이 되자 스스로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무너져내렸다. 자신이 태어났던 경기도 구리의 병원은 이미 사라져버려 출생기록을 볼 수 없었다. 입양기관의 사회복지사는 “기록에 엄마 이름은 없다.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망과 분노 때문에 그녀는 나머지 여행 일정을 포기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레이스씨는 “나중에 입양기관에서 받아본 원본서류의 복사본에는 가족에 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레이스씨는 이후 한국을 다시 찾아 경기도 일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원어민교사로 재직 중이다. 지난 7월에는 가족 찾기 방송에도 출연했다. 그레이스씨는 “그저 내 뿌리만 찾고 싶을 뿐인데 힘들고 지친다”고 말했다.

(위)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홍보릴레이 사진전‘Say I love you’ 작품 중 인천 지역 입양가족의 모습.(아래)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홍보릴레이 사진전‘Say I love you’작품 중 이광흠씨 가족의 모습. /입양홍보회 제공
(위)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홍보릴레이 사진전‘Say I love you’ 작품 중 인천 지역 입양가족의 모습.(아래)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홍보릴레이 사진전‘Say I love you’작품 중 이광흠씨 가족의 모습. /입양홍보회 제공

◇아동 중심의 입양, ‘뿌리 찾기’ 가능해진다

이제 그레이스씨와 같은 사례는 국내에서 사라질 전망이다.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지난 8월 5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입양인은 중앙입양원 또는 입양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자신의 입양정보 공개를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양아동의 정보는 중앙입양원을 통해 일원화, 입양아동들이 개별적으로 입양기관을 찾지 않아도 된다. 한국입양홍보회 한연희 회장은 “예전에는 입양아동이 성장한 후에 친생부모를 찾고자 할 때 정보를 알 수 없어서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보다 쉽게 친생부모를 찾을 수 있다”며 “다만 이 경우에도 친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입양인들은 “입양아동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선진국형 입양정책”이라며 환영을 표시했다. 생후 7개월 만에 독일로 입양된 소냐(28·한국명 이순자)씨는 2002년 이후 4차례나 한국을 찾았다. 뿌리를 찾아주려는 독일 부모님의 배려였다. 그녀의 남동생 또한 한국에서 입양된 입양아다. 하지만 10년째 이어진 ‘뿌리 찾기’는 힘든 과정이었다. 소냐씨는 “입양되기 전 머물렀던 지방의 보육원에도 찾아가 보고 신문 인터뷰와 TV 출연까지 했지만, 아직 아무 소득이 없다”며 “입양기관에 갈 때마다 직원들이 바뀌니 내 사연을 자꾸 되풀이해서 설명해야 하고, 한국말이 서툴러 매번 통역자를 구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소냐씨는 아예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2년 전 경희대에 입학해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법과 제도가 갖춰진 입양, 입양이 신중해진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입양아동은 2464명(국내 1548명, 해외 916명)이다. 50년이 넘은 오랜 역사에도 그동안 입양 관련 법과 제도가 미비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개정된 입양특례법으로, ‘입양=민간단체의 자선행위’라는 공식은 깨지고 ‘국가가 책임져야 할 아동의 권리’라는 개념으로 중심축이 바뀔 전망이다.

예전에는 시ㆍ군ㆍ구에 신고만 하면 입양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가정법원 허가제). 또 입양을 원하는 미혼모 등 친생부모는 반드시 7일의 입양숙려기간을 갖도록 의무화했다(입양숙려제). “미혼모는 정부의 재정지원에 대한 충분한 상담을 받은 후에 그래도 본인이 아동을 양육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때 신중하게 입양을 선택하도록 한다”는 게 정부의 방침이다. 양부모의 자격요건도 강화된다. 아동학대·성폭력 등 범죄나 알코올·마약 등 약물중독 경력이 있으면 입양을 못 한다. 입양아동은 친양자 지위가 부여되기 때문에 부부가 혼인 중 출생한 자녀와 동일한 법률적 지위를 갖게 돼, 쉽게 파양(罷養ㆍ양자 관계를 끊는 것)되는 걸 막을 수 있다.

한연희 한국입양홍보회 회장은 “입양절차 전반에 대한 국가의 관리감독 의무가 강화돼, 입양이 보다 신중하게 이뤄질 전망”이라며 “입양아동이 법률적·심리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상_그래픽_입양_최근3년간국내외입양현황_2012◇사회가 아이를 키우는 입양, 입양 사후서비스 강화

국내입양을 우선 추진하기 위한 조치도 마련됐다. 입양기관의 장은 입양의뢰된 때로부터 5개월간 국내입양을 추진하고, 이후 해외입양을 추진하고 있다. 입양의 사후서비스도 강화했다. 입양가정 사후관리기간이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되고 국내 입양가정은 1년 동안 3개월마다 가정조사를 받아야 한다. 해외 입양아동은 친생부모 찾기·국적회복 지원, 고충상담 등의 사후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일부에선 ‘시기상조’라며 부작용을 우려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선진국형’ 입양특례법이 조기에 정착되려면 입양에 대한 인식변화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아홉 살 때 남동생과 함께 입양된 정영범(22·서울예대 한국음악과)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입양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정씨는 “비밀입양돼 자신이 입양아인 줄도 모른 채 자라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충격과 스트레스로 소속감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 사회가 입양을 비밀시하거나 입양아를 특이하게 보는 편견을 없애고, 입양아동들은 입양이 나쁜 게 아니라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자식 3명 외에 자녀 2명을 공개입양한 김충근(50·경기도 안성)씨는 그 자신이 입양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된 후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 전국을 떠돌며 구두닦이·신문팔이·연탄공장·덤프트럭 운전을 하며 방황했다. 김씨는 “나는 너무 늦게 입양사실을 알았고 그 충격으로 안 해도 될 방황을 많이 했다”며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양어머니와 충분히 사랑을 쌓아나갈 수 있었는데”라고 했다. 입양부모가 베풀어준 무한한 사랑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그는 다시 입양을 통해 그 사랑을 대물림하고 있다.

박란희 편집장

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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