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 사라져도 고통 여전 – 복구 몇 년씩 걸리지만 도움 손길 턱없이 부족
난민들 대부분이 극빈층 – 전 세계 기후 난민 작년에만 2000만명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10분도 안 돼, 필리핀의 라구나주(州) 로옥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금세 진흙탕으로 바뀌었다. 찢어진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이 비를 피해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 제시는 용케도 물웅덩이를 피해 달리며, 우리를 천장 낮은 집으로 안내했다. 길과 바로 마주한 문 앞에 신발을 벗어놓고 집 안으로 들어서야 하는데, 축축한 흙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방 안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시 엄마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손으로 낡은 의자를 가리켰다.
두 평 남짓한 공간이 전부인 집에는 제시와 엄마, 그리고 갓 아이를 낳은 스무 살 큰딸이 함께 살고 있다. 제시의 아버지는 4년 전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뼈와 거죽만 남은 듯한 제시는 수학을 좋아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좁은 방 안에는 책상도 책도 학용품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멋쩍은 듯 “태풍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이곳에 임시로 정착해서 변변한 살림이 없다”고 했다.
아이 다섯을 둔 이웃집의 미찌(26)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진흙 바닥 위에 나무로 사방을 둘러 집 모양만 갖춘 곳에서 일곱 식구가 산다. 기아대책에서 나눠 준 장판이 바닥의 찬 습기를 막아주는 유일한 물건이다. 집 곳곳은 쥐들이 파먹어 구멍이 나 있고, 좁은 공간에서 아이들은 기침을 했다. 여섯 살 나다니엘은 백내장에 걸렸지만, 당장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집안 형편에 수술은 꿈같은 일이다. 미찌씨는 “동사무소에서 극빈층 증명을 받으면 5000페소(13만원)로 아이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무면허로 오토바이 배달을 하는 남편은 단속에 걸리지 않고 아이들 식사값을 벌어오는 것이 목표다.
이 ‘임시’ 정착처에는 두 가족과 비슷한 사정의 1000여명이 살고 있다. 2006년 태풍 ‘밀레니오’가 왔을 때 ‘라구나’호숫가에 살다가 태풍과 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이주했다. 1000명이 공동 화장실 6개를 함께 사용하고, 10m 깊이의 우물을 파서 식수로 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물 안으로 쓰레기와 진흙이 흘러들어가 엉망이 되지만, 물과 시설이 부족한 주민들에겐 다른 대안이 없다.
기아대책 이종식 봉사단원은 “아시아 지역은 겉으로만 보면 절대 빈곤 상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화려한 도시 이면엔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다음 날 다얍 지역의 이재민 정착촌을 찾았다. 이곳 역시 2009년 태풍 ‘온도이’로 삶의 터전을 잃은 마닐라 도시 빈민들이 강제 이주한 곳이다. 한낮의 찌는 듯한 태양 아래로 똑같은 시멘트 건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4000가구, 2만여명이 살고 있다. 생계가 막막한 남자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배달에 나서고, 집과 멀리 떨어진 건설 현장으로 기약 없이 떠난다. 남은 아이들과 엄마들은 내일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막막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곳 역시 기아대책에서 제공하는 영양 급식이 삶의 유일한 낙처럼 보였다.
필리핀 라구나 주민처럼, 환경 재앙으로 인해 거주지를 떠나 이주해야 하는 사람들을 ‘기후 난민’이라고 부른다. 1980년대 환경 파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자연재해가 많아지면서 등장했다.
지난 20년 동안 기후와 관련된 자연재해는 연평균 200건에서 400건으로 갑절 증가했다. 현재 세계 28억명이 기후변화가 초래한 홍수, 폭풍우, 가뭄 등에 노출된 지역에 살고 있다. 유엔 인도주의사무조정국은 지난 한 해에만 2000만명 이상이 기후와 관련된 환경 재앙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인구 3분의 1을 넘는 숫자다.
국제이주기구들의 협의체인 세계이주그룹은 해수면 상승으로 작은 섬나라들의 땅 면적이 줄어들고 가뭄과 사막화로 인해 터전을 잃고 있어, 2050년까지 최대 10억명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인구 7명당 1명이 기후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해안가에서 100㎞ 이내에 거주하고, 10%는 해안선 10㎞ 이내에 살고 있어 기후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기후 난민의 특징은 때와 장소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7월 서울, 경기에 사흘간 내린 폭우로 수십 명이 숨졌고, 태국 역시 홍수로 최대 18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악의 피해를 겪었다. 파키스탄의 홍수 역시 1000만명 이상의 피해자를 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피해가 크다. 이 지역에서 기후변화로 사망하는 사람이 전체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은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그 지역 주민의 삶을 파괴하지만, 도움의 손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번 발생하면 피해 규모가 몇년 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기도 하거니와, 빈번하게 일어나는 재해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 역시 조금씩 무뎌지기 때문이다.
기아대책 이요셉 국제사업본부장은 “우리나라도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 어렵다”며 “긴급 구호 상황에서 국가 간 공조 시스템을 갖추고, 개인들의 작지만 소중한 나눔을 통해 생명을 살리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어려운 아이들을 돕거나, 대학 입학금 지원 캠페인에 관심 있는 분은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후원 방법
●문의: 02)544-9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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