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로컬 역량 지도 <1>
229개 기초지자체의 자산 역량 유형화한 지표 첫 등장
“비가 많이 오고, 눈도 많이 내리는데…무슨 산업을 할 수 있겠어요.”
1900년대 초, 일본 후쿠이현 북부의 작은 도시 사바에시(鯖江市)는 ‘포기할 이유’가 넘쳐나던 지역이었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지형, 불리한 기후, 부족한 제조업 기반. 젊은이들은 빠르게 도시를 떠났다. 하지만 이 도시는 특이하게도 농한기 부업으로 ‘안경 제조’라는 틈새 산업을 선택했다. 대규모 설비 없이도 가능한 조립·가공 중심 산업이었고, 분업을 통해 지역 여성과 노년층까지 일손으로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사바에시에는 안경다리·렌즈·코받침 등 부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업체부터 안경 제조 전 공정을 담당하는 대기업까지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현재는 일본 전체 안경 생산의 약 90%를 책임지는 지역이 됐다. 산업 기반이 자리 잡으면서 일자리도 늘어나, 1957년 4만 7855명이던 인구는 2015년 6만 9037명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안경의 도시’로 알려진 사바에시는 관광도시로도 다시 태어났다. 도심 곳곳에는 안경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된 ‘안경 거리’가 조성됐고, 안경을 구매하거나 안경테·스트랩 등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인 ‘안경 박물관’도 관광 명소가 됐다. 도시가 활기를 되찾으면서 사바에시가 속한 후쿠이현은 2016년 기준 정규직 고용률 67.3%로 일본 전국 1위를 기록했으며, 전국 행복지수 조사에서도 1위에 올랐다. 단점은 전략이 됐고, 약점은 자산이 됐다.
지방을 소멸과 위기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대, ‘지역의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들여다보는 새로운 도구가 등장했다. 이슈·임팩트 측정 전문 기업 ‘트리플라잇’과 전영수 한양대 국제대학원 지속가능경제학과 교수 연구팀이 공동 개발한 ‘지역자산역량지수(Korea Local Asset Competency Index·이하 KLACI)’가 지난 7일 첫 공개됐다. 전국 229개 기초지자체를 인구·경제·생활·안전이라는 네 가지 범주로 나눠 역량을 수치화하고, 그 조합으로 지역의 성격을 분석한 국내 첫 시도다.
◇ 지역도 성격이 있다…강점·약점 조합으로 16개 유형 분류
KLACI는 전국 229개 기초지자체를 대상으로 ▲인구성장력(12개 지표·24점) ▲경제활동력(15개·36점) ▲생활기반력(13개·18점) ▲안전회복력(15개·32점) 등 4개 범주의 총 55개 정량 세부 지표를 분석해 110점 만점의 역량 점수를 산출했다. 특히 지역 소멸 위기의 핵심 변수로 꼽히는 인구와 경제 항목에 전체의 절반 이상인 60점을 배정한 것도 특징이다.
전영수 교수는 “지금까지는 중앙정부 중심의 일률적인 평가, 또는 단편적 지표 나열 방식이 지역을 진단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며 “KLACI는 인구·경제·생활·안전 등 4대 자산의 조합 구조를 정량화함으로써, 강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지역의 ‘성격’으로 읽을 수 있게 한 분석 도구”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히 순위를 매기기보다, 지역의 고유한 맥락과 구조적 특성을 반영해 자산의 구성과 균형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가장 큰 차별점”이라며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선투입 예산을 줄이고, 약점을 특화 자산으로 전환해 지역만의 정체성과 스토리를 만드는 전략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KLACI는 단순한 점수의 크기보다, 자산 조합의 균형과 특성에 주목한다. 분석 방식은 MBTI처럼, 인구(G/S), 경제(T/C), 생활(V/M), 안전(R/A) 항목의 강점·약점 조합으로 총 16개 유형을 나눈다.
예컨대 ‘GTVR’은 네 범주 모두에서 강점을 보이는 ‘만능성장형’, ‘SCMA’는 전반적으로 약점을 가진 ‘개발도약형’이다. 유형별 코드는 대문자·소문자 조합을 통해 역량 수준까지 함께 구분했다. ‘GTVR’과 ‘gtvr’은 구성은 같지만 역량 강도가 다르다.
◇ 상위 10위 지자체, 공통은 ‘인구·경제·안전’ 강점
전국 229개 지자체 중 종합 점수 기준 상위 10개 지역은 다음과 같다. ▲경기 평택시(80.852점) ▲화성시(80.839점) ▲용인시(80.611점) ▲수원시(79.256점) ▲시흥시(78.735점) ▲충북 청주시(77.792점) ▲인천 서구(77.753점) ▲고양시(77.305점) ▲인천 연수구(76.721점) ▲남양주시(75.927점) 등이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인구성장력과 경제활동력, 안전회복력 부문에서 고른 점수를 기록했다. 청년층의 유입과 인구 구조의 안정성,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균형 있는 산업 기반, 높은 일자리 수준 등이 종합 점수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됐다. 정주 여건과 생활 인프라도 평균 이상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지역별 자산 구조는 동일하지 않았다. 예컨대 청주시는 비수도권 중 유일하게 10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수도권에 비해 생활기반력은 평균 수준에 그친 반면 혼인율·전입인구 등 인구성장력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시흥시는 문화기반시설수 등 생활기반력 점수는 낮았지만 안전회복력에서 강점을 보여 상위권에 진입했으며, 서구와 연수구는 보육시설수, 주택노후도 등 생활기반력이 취약한 반면, 인구와 경제 관련 지표가 수도권 내 상위권이었다.
이처럼 상위권 지자체라도 강점의 조합과 자산의 구조는 제각각이었다. 단순한 점수 비교보다, 어떤 자산이 강점이고 어떤 부분이 보완이 필요한지에 대한 구조적 해석이 필요하다. 전 교수는 “지자체의 미래 전략은 점수보다 자산의 조합과 균형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약점을 자산화할 수 있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KLACI는 분석 결과와 함께 ‘원석 레이더 차트’를 제공한다. 이는 각 지자체의 인구·경제·생활·안전 자산의 균형과 특성을 시각화한 그래프다. 특정 범주에서 점수가 낮더라도, 세부 항목에서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이를 중심으로 특화 전략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경제 점수는 낮지만 제조업 특화율이나 벤처기업 수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는 지역이라면, 이 강점을 중심으로 신산업 유치나 지역 브랜드화 전략을 도출할 수 있다.
이은화 트리플라잇 공동대표는 “앞으로는 정량 지표뿐 아니라 정성적 요소와 지역 현실을 반영한 방식으로 지표를 고도화할 계획”이라며 “정책, 산업, 투자 등 각 분야 이해관계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모델로 확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어 “지자체마다 데이터 기반으로 현재 위치를 진단하고, 유사 지역과 비교해 강점과 취약점을 전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표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