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개국 2967건 분석한 연례 보고서 공개
韓 헌재 판결, 동아시아 첫 기후책임 인정 사례로 주목
전 세계에서 기후소송이 확산하는 가운데, 단순한 법적 판단을 넘어 ‘판결의 이행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인정하면서, 동아시아 최초로 정부 기후책임을 명문화한 판결 사례로 기록됐다.
런던정치경제대(LSE) 산하 그랜덤 기후변화·환경연구소는 25일 ‘기후변화 소송의 글로벌 동향: 2025 스냅샷’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세계 최대 기후소송 데이터베이스인 ‘사빈 기후변화법 센터’의 자료를 바탕으로 1986년부터 2024년까지 총 60개국 2967건의 사례를 분석했다. 미국(1899건), 호주(164건), 영국(133건), 브라질(131건), 독일(69건)이 주요 소송 국가로 꼽혔으며, 코스타리카는 2024년 처음으로 기후 소송국에 이름을 올렸다.
기후소송의 80% 이상은 각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됐으며, 276건은 헌법재판소나 대법원 등 최고 법원까지 올라갔다. 한국의 경우, 2023년 말 헌법재판소가 정부에 ‘보다 구체적이고 강력한 온실가스 감축목표 설정’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전환점을 만든 사례로 평가받았다.
보고서는 “단순한 승소 판결을 넘어, 정부가 실제로 얼마나 이를 이행하는지가 향후 기후소송의 최대 변수”라고 진단했다. 유럽인권재판소(ECHR)가 스위스 노인 여성들의 손을 들어주며 정부의 기후대응 실패가 생명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한 사건도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제사회는 해당 판결이 얼마나 현실에 반영되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후소송도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해 신규 소송의 20%는 기업이나 경영진을 상대로 진행됐고, 이 중 ‘기후 워싱(Climate-washing)’을 문제 삼은 사건이 25건에 달했다. 특히 호주에서는 ESG 채권을 홍보한 글로벌 자산운용사 ‘뱅가드 인베스트먼트’가 허위 광고로 적발돼 약 2000만 호주달러(한화 약 177억 원)의 벌금을 물며, 사상 최대 규모의 그린워싱 제재 사례로 기록됐다.
아시아에서도 기업의 기후책임을 묻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오는 8월, 일본에서는 10개 화력발전 기업을 상대로 청소년 16명이 기후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보고서는 “아시아 최초의 청소년 주도 기업 소송”이라며 “과학 기반 탄소 예산 개념을 법적 의무로 제시한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국에서도 기업과 금융기관을 겨냥한 소송이 등장하고 있다. 청년단체 ‘빅웨이브’는 지난 2월, 국민연금이 기후 리스크를 방치해 자산 손실을 유발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보고서는 이를 ‘전환 리스크 소송’의 새로운 유형으로 분류했다.
한편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피해에 책임을 묻는 ‘오염자 부담(Polluter Pays)’ 소송은 2015년 이후 누적 80건에 달하며, 2023년 한 해에만 11건이 새로 접수됐다. 반면 정부 정책이나 ESG 추진 자체를 문제 삼는 소송은 지난해 50건이 제기되며 연간 최다 기록을 세웠다. 특히 미국은 정치 변화에 따라 이러한 소송의 증가세가 뚜렷했다.
보고서는 향후 기후소송의 주요 흐름으로 ▲기후재난 이후 법적 책임 분쟁 증가 ▲‘에코사이드(Ecocide)’의 국제범죄화 논의 확산 ▲기후·환경·인권 소송 간 연계 심화 등을 꼽았다.
보고서의 공동 저자인 조아나 세처 LSE 부교수는 “기후소송은 정책을 견인하는 전략 도구로 진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도 맞물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캐서린 하이햄 연구원은 “기후소송은 더 이상 법률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며 “기업과 금융권 모두에게 명백한 재무 리스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