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3일(토)

[기차에서 일합니다] 인어도 환영하는 화장실

정유미 포포포 대표
정유미 포포포 대표

항공사 예매 창의 Gender 선택 카테고리에서 스크롤을 내리다 주춤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으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예매하는 중이었다. F-Female, M-Male, X-Unspecified(명시(지정)되지 않은), U-Undisclosed(밝혀지지 않은, 비밀에 부쳐진). 낯선 질문으로부터 변화의 기류가 피부에 와닿았다. 현지에서 “May I pronoun?”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인칭 대명사(Personal Pronoun)를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라는 의미였다.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고 이후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점에서 팔던 She/Them, He/They 같은 서로 다른 인칭 대명사가 공존하는 배지의 뜻을 그제야 이해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SNS 프로필의 인칭 대명사를 유심히 보게 됐다. 생물학적 상태와는 별개로 불리기를 원하는 지칭 명사를 물어보는 게 에티켓이 됐다.

레스토랑, 학교를 비롯한 미국의 공공장소에서 성중립 화장실을 심심찮게 발견했다. All gender restroom, Gender neutral restroom 등 여러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었다. 심지어 구글에서는 남성, 여성, 임산부, 해적, 인어, 배트맨, 외계인, 운영 체제인 안드로이드 등 여러 아이콘을 더해 공간의 특성을 드러냈다. 인간의 가장 주요한 또 내밀한 영역인 동시에 역사에서 성별과 인종을 기준으로 가장 오래 차별받아 온 공간. 화장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다.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상태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모두 ‘나’라는 여러 정체성이 혼재된 결정체일까. 혹은 그 무엇도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타인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는 메시지일 수도.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건 소외된 자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에 관한 담론으로 연결된다. LA타임스에 따르면 2026년부터 캘리포니아 공립학교를 거점으로 성중립 화장실이 의무 설치될 예정이다. 3억 4000만 미국 인구 중 트렌스젠더 인구 비율은 1% 미만, 소수점에 머문다. 그럼에도 소수를 포용하는 공공 정책을 논의한다는 사실. 그 결과를 목도하는 건 낯설지만 신선한 변화였다.

물론 강남역 화장실 사건을 비롯해 여러 진통을 겪어 온 한국에 도입하기에는 아직 이를 것으로 보인다. 성공회대에 이어 카이스트에서 시범적으로 선보인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찬반 여론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 다만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하기엔 우리는 이미 초연결 시대에 살고 있다. 시기상의 문제일 뿐 가까운 미래에 동일한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팬데믹을 겪는 동안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졌다. 서로 다른 타임라인에서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디지털 노마드로 삶의 형태가 바뀌었다. 평균 기대수명 120세인 알파 에이지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존의 가치관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더 빠르게 해체와 조립을 반복 중이다. 인간의 생애주기가 성장과 노화라는 전후반 40년으로 구분됐다면 이젠 연장전을 준비해야 한다. 추가된 시간은 무려 40년. 여든이면 한창 일할 나이, 뉴 포티(New Forty)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평생 직업이란 단어는 사라지고 두 세기에 걸친 생애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농축한 표현이 등장할 것이다.

생물학적 나이에 대한 인식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급부상하는 기술 사이의 균열은 속수무책으로 벌어지고 있다. 영화 ‘Her’의 주인공처럼 인공지능 속 AI와 사랑에 빠지는 인류가 생겨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니 수면 위로 가시화되는 일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평생의 반려자로 인공지능을 택하는 인구가 증가할 경우 법적 제도는 어떤 기준으로 개편될까. 포용할지, 거부할지,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각종 논쟁에 불붙을 것이 뻔하다. 기술의 도입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지만 규제는 가장 마지막에 도입되는 곳. 한국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챗 GPT가 대학생의 리포트며 직장인의 보고서 작성을 대행하는 것이 공공연해졌지만 여전히 가이드라인은 전무한 상황이다.

경계의 명확성이 사라진다. 흑과 백처럼 획일화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중간계의 교집합이 커질 것이다. 새로고침 기능처럼 모든 것이 실시간 업데이트되는 현실에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듣도 보도 못한 사례가 증가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과거로부터 오랜 시간 전해져 온 가치와 철학을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난무하는 질문 속에 흔하게 목격하는 키워드는 ‘장애’. 오늘 점심 메뉴만 떠올려도 ‘결정장애’에 빠지고, ‘공황장애’ 진단은 감기만큼 흔한 현대인의 질병이 됐다. 어쩌면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장애는 그 무엇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상태가 아닐까. 아니 그 전에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시스템의 부재와 사회 안전망의 구멍은 없었는지 점검이 시급하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지금 우리는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들은 점점 더 복잡미묘하고 애매모호해질 것이다. 과거를 답습하는 것에서 나아가 예측을 뛰어넘는 내일에 대비해야 한다. 사람이 자원인 작은 나라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최단 시간에 거둔 눈부신 발전의 배경에는 한국 특유의 에스컬레이터형 문화가 있었다. 오지선다 안에서 정답을 고르고 주어진 환경에서 착실하게 시간의 페달을 밟아 온 평범한 사람들이 이룩한 성과다. 객관식에서 주관식으로 질문의 형태가 달라진 지금, 한국은 넷플릭스 1위 콘텐츠는 잘 만들어도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시장은 만들지 못한다는 찬사와 혹평을 오간다. 맹목적이고 획일화된 답정너 사회의 고도 성장은 이미 과거의 유물로 전락했다. 전도유망한 미래 기술을 빨리 학습해 문제를 잘 푸는 것에서 상상하는 것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질문을 끌어낼 수 있는가,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수 있는가로 중심축이 이동했다.

십 년 넘게 지역에 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 사회의 ‘이방인’인 나는 ‘경계인’이라는 새로운 균형 감각을 익혔다.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해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아니하는 사람. 여러 층위의 생활을 면면이 들여다보고, 다양성에 대한 지표가 쌓이는 동안 기준점은 명료해졌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보는 경험의 경계에서 그 경험의 단상이 누군가에게 비수로 돌아가지 않도록 경계한다. A=B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유연하되 또렷한 주관의 중요성을 날로 체감한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 다름에 대한 이해처럼 오직 인간만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요소들. 인종,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바탕으로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 어떠한 모습이든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는 보이지 않는 데 있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만나 합의점을 도출해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진화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모히칸 머리를 하고 근위병 스커트와 킬힐을 신은 사람의 생물학적 성별이 무엇이든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정유미 포포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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