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8000명인 경남 진주 문산읍의 작은 책방 ‘보틀북스’에서는 매주 문화 행사가 열린다. 8평(26㎡) 남짓한 작은 공간이지만, 매달 200명 넘는 주민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한다. 연령층도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가의 북토크쇼가 열리는 날에는 함안, 의령 등 인근 지역의 사람들도 몰린다. 특히 의령은 관내 서점이 단 한 곳도 없는 문화소외 지역으로, 서점을 이용하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보틀북스에는 올해만 강원국, 김금희, 김초엽 등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방문했다. 채도운 보틀북스 대표는 “대부분의 지원 사업에는 기획비나 인건비가 포함돼 있지 않아 서점에 별도의 수익은 발생하지 않는다”며 “그래도 공모사업을 계속 하는 이유는 지역에는 문화적 목마름을 느끼는 주민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년에는 이 같은 지역서점의 문화 프로그램 운영이 중단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24년도 예산안에서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 11억원을 전액 삭감하면서다. 내년 지역서점 지원 예산은 총 15억1000만원. 이 중 12억5000만원이 이번에 신설된 디지털 도서물류 지원 예산으로 잡혔다. 실질적으로는 출판 업계가 공동으로 활용하는 유통 구조 개편에 투입되는 것이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이하 한국서련)에 따르면 전국 지역서점에서 진행하던 750여 개 문화 프로그램이 사라질 전망이다.
중앙정부 예산이 삭감되면서 지방자치단체 지원이 줄어들 가능성도 높아졌다. 지난해 문체부는 지자체에도 지역서점 지원을 독려했다. 각 지자체는 문체부와는 별도로 예산을 투입해 지역서점 활성화를 지원했다. 지역서점은 문체부, 지자체의 공모사업을 여러 개 신청해 프로그램들을 운영했다. 권미선 한국서련 정보화사업팀장은 “현장에서는 중앙정부 기조에 따라 지자체 지원까지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고 말했다.
지역서점 지원은 예산 투입 규모에 비해 효과가 큰 사업이었다. 지역서점들은 지원금을 활용해 문화 콘텐츠가 없는 소도시에서 ‘복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경기 김포 ‘책방짙은’에서는 시와 고전을 테마로 총 14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시인 특강, 고전읽기 모임 등을 진행한다. 최근에는 박해영 ‘나의 해방일지’ 작가, 박준 시인 등이 지역 주민들과 만남을 가졌다. 지난 8월부터는 ‘열하일기 완독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 주민 10여 명이 매주 전문가 강연을 들으며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를 3달 동안 완독하는 프로그램이다. 오는 11일에는 보자기 아트 수업을 들으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보자기로 예쁘게 포장하는 ‘책거리’도 할 예정이다. 최수이 책방짙은 대표는 “지역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모여 책을 매개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서점에서는 글쓰기 같은 책과 직접 연계된 활동 외에도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원데이클래스’가 열린다. 그림책 캐릭터 인형 만들기, 서양 고전에 등장하는 스테인드 글라스 만들기, 뜨개질, 꽃꽂이 등 클래스 등 다양하다. 강사로는 다른 지역 전문가가 방문하기도 하지만 지역 주민 중 전문성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 경력단절여성이나 신진 예술가 등에게는 새로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발판이 되는 셈이다.
지역서점은 2000년대부터 감소 추세였다. 한국서련의 ‘2022 한국 서점 편람’에 따르면 국내 서점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03년 3589개였던 전국 서점 수는 2022년 2528곳으로 감소했다. 이 중 49%는 서울, 광역시 등 대도시에 집중돼 있다. 강원 평창, 경남 의령, 경북 봉화 등 7개 지역에는 서점이 단 한 곳도 없다. 또 지역 내 서점이 1곳에 불과한 기초자치단체도 29곳이나 된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7조의 2항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서점’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을 해야 한다. 이에 문체부는 지난해 8월 ‘출판문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이하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지역서점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역서점을 살리고 지역 문화도 부흥한다는 취지였다. 올해는 지역서점 경쟁력 강화 사업에 5억5000만원, 지역서점 문화활동 지원 사업에 6억5000만원, 총 11억원이 투입됐다.
현장에서는 “수익이 적은 지역서점이 별도 지원이 없이 단독으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엔 벅차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북토크쇼나 강연에 전문가를 초청하려면 건당 50만~70만원이 든다. 거리에 따라 교통비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채도운 보틀북스 대표는 “내년도에는 진주 지역의 특색을 살려 진주 사투리와 관련된 책을 읽고, 사투리 보존 활동과 연관 짓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었지만, 활동 비용을 서점에서 모두 부담하기는 어려워 고민”이라고 말했다. 이어 “프로그램이 유료화되면 가장 먼저 책방에 발길을 끊을 사람은 저소득층, 노인 등 문화 소외계층이기 때문에 쉽게 유료 전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미선 한국서련 정보화사업팀장은 “문체부가 통 삭감한 11억원은 문체부 전체 예산의 0.2%에 불과하다”며 “예산 삭감으로 결국 피해를 보게 되는 건 문화 프로그램을 향유하던 국민”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점계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지역서점이 독서 문화 생태계 안에서 생존하고, 문화 거점으로 역할 할 수 있도록 지원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