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을 마주하고 있는 섬마을 영도에 최근 새로운 명소가 또 하나 등장했다. 서울 연희동에서 연남장 등 신세대 핫플레이스들을 잇달아 선보여 온 로컬 콘텐츠 기업 어반플레이가 주도해 지상 6층의 초대형 복합문화공간을 선보인 것. 멀리서 봐도 확연히 눈에 띄는 현대적 감각의 공간은 1층 베이커리와 4층 카페만 부분 개장 했는데도 벌써 문전성시다. 9일 방문했을 땐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고 계산대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쳐 주문하고 음료가 나오는 데만 20분가량이 걸렸다.
여의도 다섯 배 크기의 면적에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던 영도는 우리 경제 부흥기에 수많은 선박 수리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조선업 쇠퇴와 함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빈집과 빈 창고가 즐비한 전형적인 해양 러스트벨트로 전락했다. 전국 구 단위 지자체 중에서 소멸 위기 1순위 지역으로 지목돼 온 영도는 최근 몇 년 새 지역 재생의 전시장이라 불릴 정도로 새로운 재생의 바람에 들썩이고 있다.
먼저 지자체의 도시 정비 사업이 분위기를 띄웠다. 2013년을 전후해 부산시의 지역 공동체 복원 사업으로 해발 395m 봉래산 기슭의 판자촌이 ‘해돋이마을’로 탈바꿈했고 피란민 집단 거주지였던 ‘흰여울마을’은 문화마을로 재정비됐다. 2015년에는 근대 조선업의 발상지라는 영도 대평동을 재생한 ‘깡깡이예술마을’이, 2019년에는 수리 조선소 근로자들이 빠져나가 슬럼화한 동네 빈집들을 창업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봉산마을’이 새 단장을 마쳤다.
관 주도 정비 사업의 흐름을 타고 민간 기업들이 뛰어들었다. 선물용 방울을 만드는 회사 창업주의 아들이 신사옥을 지으며 회사 이름을 따 만든 카페 ‘신기산업’은 오션뷰 맛집으로 대박을 치며 영도에 카페 전성시대를 열었다. 삼진어묵을 만드는 삼진식품은 아띠장(아티스트+장인) 육성을 위한 복합 문화 공간 ‘AREA6’로 또 다른 명성을 얻었다.
관 주도 재생 사업이 고령화·슬럼화 정도가 심한 노후 주거지를 재개발해 아파트나 공동주택을 지어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젊은 외지인들을 끌어들이는 통상의 경로를 답습하고 있다면 민간 사업자들은 영도의 산업 유산과 자연환경을 활용해 대형 카페와 같은 앵커 공간을 만들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사람과 돈의 이동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같은 영도 스타일의 로컬 만들기는 요즘 전국 각지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대형화·전문화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가능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로컬의 공간 자원 개발에 자본과 사람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SNS를 타고 마케팅 분야에 로컬 바람이 불면서 이젠 재벌급 대기업들도 앞다퉈 로컬의 랜드마크 공간 확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유력 대권 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골목길 학자로 불리는 연세대 모종린 교수와 만나 로컬 골목 상권 활성화 방안을 의논한 게 화제가 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대규모 개발형 공간 재생에는 전문기획자, 디벨로퍼, 투자자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문 디자인 기업이 패션의 흐름을 이끌고 대형 연예기획사가 K팝 흐름을 만들어 가듯이 로컬의 영역에서도 재능 있는 인재와 자본이 결합한 창의적인 대형 프로젝트들이 전국에서 우후죽순 진행되고 있다.
기업과 투자자들이 로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로컬기업도 기술기업 못지않게 양적·질적 성장(스케일업)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분명 환영할 일이다. 아쉬운 것은 그 방식이다. 창의적 소상공인들이 자신의 취향과 재능을 담은 생활문화 공간을 만들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느리게 형성되는 로컬 경제의 성장 경로와는 사뭇 다른 길이다. 대기업이 유명 관광지에 지은 대형 리조트에 인파가 몰리지만 정작 지역 주민들은 이들에게 생수와 국밥을 파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양극화 모델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영도를 떠나면서 탄 택시 기사는 “영도는 다 죽었는데 카페만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아직 그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당신들의 로컬’일 뿐이라는 얘기처럼 들렸다.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