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4.0] 서상목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새싹보리’로 노숙인 문제를 해결하자.” 2018년 원주에서 시작된 기발한 프로젝트가 성과를 내고 있다. 가로 12m 세로 2.9m 컨테이너 2동을 항온기, 제습기, LED 광원 등을 갖춘 스마트팜으로 꾸민 뒤 지역 노숙인들에게 농작물 재배를 맡긴 ‘원주 도시농부 아카데미 하우스 프로젝트’다. 초보 농부로 변신한 노숙인들의 의욕은 대단하다. 수확한 새싹보리로 로컬푸드 인증을 받았고, 새싹보리를 분말로 가공하는 데 성공해 현재 유통 판매 허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고부가가치 농작물 판매를 통해 노숙인들의 자립을 돕는 게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다.
지난 4일 만난 서상목(73)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은 “사회복지 현장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시설에서 노약자를 돌보거나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구호 활동을 벌이는 수준을 넘어, 지역의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수행하는 단계까지 왔다. 서 회장은 “정부와 기업, 주민이 협력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인 사회복지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면서 “원주 도시 농부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사회복지 4.0 시대… 핵심은 ‘지역복지공동체’
―원주 사례는 종전에 우리가 알던 ‘사회복지’와 형태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사회복지가 시작된 게 18세기 중반입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영국에서 빈곤 문제가 생겨났고, 기업가들이 자비를 털어 빈곤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어요. 대부분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가난해진 것을 알 수 있었죠. 늙어서, 아파서, 직업을 잃어서.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선 단체가 생겨났어요. 1860년대 영국에만 자선 단체가 수백 곳 설립됐는데 이 자선 단체들이 모여 COS(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라는 연합회를 조직했습니다. 사회복지의 태동이죠. 지금은 2차, 3차 산업혁명을 지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됐어요. 시대가 변했으니 당연히 사회복지도 달라져야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회복지는 어떤 모습인가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죠.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한 게 사회복지입니다. 2차 산업혁명 때 ‘사회복지 2.0’이 나왔고, 3차 산업혁명 때는 ‘사회복지 3.0’이 나오는 식으로 진화해왔죠. 양극화, 고용 절벽, 인간성 상실 등 3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문제가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고민입니다. 이걸 치료할 새로운 처방전이 필요해요. ‘사회복지 4.0 시대’가 열린 셈이죠. 결론부터 말하면 ‘지역복지공동체 구축’이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복지공동체가 뭐죠?
“말 그대롭니다.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공동체가 아닌 복지공동체를 구축해 여러 일을 벌이는 거죠. 지역의 사회문제를 지역 주민들이 직접 발굴하고 민(民)과 관(官)이 협력해 함께 해결해나가는 방식입니다.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인간성이 회복되고, 지역 기반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양극화나 일자리 문제도 해결될 겁니다.”
―도시농부 프로젝트가 바로 그런 사례군요.
“사실 원주에 노숙인 문제가 있다는 걸 우리도 몰랐습니다. 지역의 문제는 당사자들만 알지 외부에선 알 수 없거든요. 원주시사회복지협의회와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알게 됐어요. 원주천 일대를 중심으로 노숙인이 많다고 하더군요. 중앙협의회 직원들이 ‘원주 도시농부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원주시협의회와 함께 직접 펀딩(Funding)을 진행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요(웃음). 원주에 있는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1억원을 지원한 덕에 컨테이너 스마트 농장을 세울 수 있었어요. 원주노숙인센터와 원주농업기술센터 등도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습니다. 원주뿐이 아닙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어요.”
사회적 가치 시대… 기업의 역할이 중요
서상목 회장은 1974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세계은행(World Bank) 소득분배과에서 5년간 일했다. 1978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사회개발부 수석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영세민 종합대책’을 만드는 연구를 주도했다. 1988년 정계에 입문해 제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93년에는 초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경제’와 ‘복지’를 아우르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박사 학위 논문도 ‘경제 발전과 소득 분배’였으니까요. KDI에 입사했을 땐 한국에서 사회복지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영세민 종합대책’을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전국의 판자촌은 다 돌아다녔고 걸인 수용소도 다 가봤어요. 그때 별명이 ‘거지 대장’이었습니다(웃음). 연구를 진행하면서 경제와 빈곤, 사회복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나라 사회개발, 사회복지가 출발할 때 그 중심에 있었고, 지금은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까지 하고 있으니 운명이라고 해야겠죠.”
―2017년 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맡아 3년간 임기를 마쳤고 올해 연임했습니다. 3년간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 하나만 꼽자면요?
“지역사회에서 꾸준히 사회공헌 활동을 펼친 기업과 공공기관을 발굴해 공로를 인정해주는 ‘지역사회공헌 인정제’를 도입한 일입니다. 지난해 처음으로 121개 기업과 기관을 뽑아 발표했어요.”
―’지역사회공헌 인정제’는 어떻게 생각해낸 건가요?
“홍콩 사회복지협의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사회공헌 잘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인정제를 시행하더라고요. NGO들에게 기업을 추천받아서 심사한 뒤 매년 ‘마크(mark)’를 달아주는 식인데 아이디어가 좋아서 우리도 시작했어요. 홍콩 모델을 베낀 셈이죠(웃음). 결론적으로는 우리 인정제가 훨씬 더 잘됐어요. 우리는 보건복지부와 함께 인정을 해주는 거라서 정부의 공신력이 더해졌죠.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도 협력하기로 했어요. 대출보증 심사 때 인정제 선정 기업들에 가산점을 주는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소기업들에겐 매력적인 조건이죠. 지역사회공헌 인증제가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겁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엔 의학에서도 ‘예방의학’을 강조하잖아요. 사회복지도 예방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적 가치’만 추구하다가 사회문제가 생겨났고, 이걸 치료하기 위해서 사회복지가 시작됐는데 이렇게 되면 돈과 시간이 많이 들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기업들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사회공헌이죠.”
서상목 회장은 1982년 설립된 영국 기업인단체 ‘BITC(Business in the Community)’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BITC는 우리나라로 치면 ‘전국경제인연합회’같은 곳이에요. 설립 초기부터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재원을 마련해 다양한 사회공헌 사업을 추진하고 있죠. 30년 전부터 영국 기업들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했던 겁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지역공동체에 필요한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재원을 보탠다면? 상상만으로 끝내진 않을 겁니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한국형 사회복지 모델’을 만들어 봐야죠.”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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