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업 여성 임원 비율은 2.7%. 스웨덴(35.9%)보다 10배 이상 적다. 육아 문제로 혹은 유리천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떠나는 여성들도 부지기수다. 개헌 논의가 진행되면서, 성차별적 구조 개선을 위한 조항을 명시하려는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19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9개 여성단체로 이뤄진 ‘성차별 해소를 위한 개헌 여성행동’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미투(Me too·나도 말한다)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며 “국가는 모든 생활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제거하고 선출·임명직 등 공직 진출에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일하는 여성들은 직장에서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으며, 성차별적 구조를 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지난 10일,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는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맞이해 ‘제2회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서’(이하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를 열었다. 컨퍼런스에 참석한 200여명의 사람들은 여성의 일과 삶, 배움에 대해 공감과 연대의 목소리를 내고, 제도와 문화의 불합리함도 따져 물었다.
◇“아이는 엄마가, 보육교사는 여자가”… 재주 많은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독서 클럽 ‘언니의 社생활’을 운영하는 Plannery의 이나리 대표는 지금껏 여섯 번의 경력단절 위기를 겪었다. 중앙일보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제일기획 비욘드제일 본부장을 역임한 이 대표. 그는 늘 일과 가정이라는 양 갈래 길을 몇 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두 달 간의 출산휴가를 모두 쓰기 위해 촉진제를 맞으며 아기를 낳았고, 출산 후에는 휴가를 다 쓰지도 못한 채 출근했다. 이렇게 하면 ‘여자임에도 여느 남성들과 견줄 만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봐줄 것 같았단다. 하지만 ‘워킹맘의 마라톤’ 뒤엔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아이를 향한 죄책감이 남을 뿐이었다. 함께할 동료, 선배들도 해가 바뀌면 조직을 떠났다. 어디를 바라보고 가야 할 지 모르는 상황,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너무나 외로운 길이었다.
송수진 고려대 글로벌경영학과 조교수 또한 아이를 낳은 후 ‘사회인으로서의 자아’가 상실될까 우려했다고 한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조교 활동 중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그는 “고용주가 임신 여성의 채용을 기피할까 걱정돼 임신 사실을 숨기고 취업해서 아이를 방학 기간에 낳고 한 달 만에 출근해야 했다”면서 “세번째 아이도 방학 때 출산하고 한달 후 바로 일터로 복귀했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보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정된 성역할’이 근본적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정된 성 역할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극히 제한적인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맡을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수학, 과학, 기계, 기술과 정치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도 그저 남성 권위자를 돕는 부수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보조화 및 배제’는 어린 시절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남자보다 수학을 못한다’ ‘여자 아이들은 로봇 보다 인형놀이를 좋아한다’… 아이들은 차별을 체감하기도 전에 학교 안팎에서 고정된 성 역할을 학습한다. 이를 통사람들은 고정된 성 역할에 적응하며, 잠재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다.
‘변화에 반응하지 않는 집단의 문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오찬호 작가는 미투 운동에 대해 “이 캠페인이 그저 매너 좋은 남자로 만드는 데 그칠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열린 생각을 가진 개인이 모여도 조직이 수직적, 경직된 문화를 공고히 하면, 인식 개선은 커녕 오히려 개인이 집단 문화에 동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백경흔 여성학자는 “많은 회사들이 육아휴직, 아빠의달 등 제도를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쓰는 사람은 극소수인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듯, 제도와 정책만으로 젠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면서 “문화의 전환을 위해 사소하더라도 성차별 행동을 지적하고 개선하는 일이 계속돼야 한다”고 답했다.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은 사회…여성이 외딴 ‘섬’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깨는 작업은 어디서부터 진행되어야 할까. 이보라 교수는 “모두가 성별이나 장애, 가정 환경에 구애 받지 않고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올바른 성 인지 교육과 인권 교육이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이뤄져야 한다”면서 “사회 전반의 고정된 성 개념을 남녀 문제가 아닌 개인 차이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부 받은 꽃을 재탄생시켜 소외계층에 선물하는 비영리단체 FLRY의 김다인 대표는 “일의 형태가 다양해진 만큼 제도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오히려 지난해 창업을 하면서 고용주가 된 후 출산 및 육아휴직 제도의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출산 및 육아휴직으로 생긴 업무 공백을 채우는 일이 부담이 될 뿐 아니라 고용주인 본인이 임신 출산 후 휴직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송 조교수 또한 “사회의 변화와 다양성이 제도에 반영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워킹맘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데 이를 배려하는 문화는 마련돼있지 않다”면서 “저녁 7시에 학부모 회의를 열어 부모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미국처럼 ‘엄마는 항상 집에 있다’가 아니라 ‘엄마도 일하기에 부모 모두 돌봄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자’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하기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규격화된 업무 방식에 따른 평가 대신 업무의 질, 완성도 중심으로 평가를 하고, 업무 단위를 시간이 아닌 프로젝트로 바꾸는 방식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일은 사무실에, 회의는 직접 만나서, 업무 시간은 반드시 9시간… 이렇게 업무 방식을 정해 두는 것이 꼭 효과적이지만은 않잖아요. 세상이 변하면서 일의 종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는데 언제까지나 규격화된 방식만 고집할 필요 없지 않나요? 즉 일하기 방식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디지털노마드’의 확산이 경력 단절 문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송수진 조교수)
한편, 컨퍼런스 마지막 시간에는 루트임팩트의 ‘임팩트커리어 W’ 론칭 발표가 이뤄졌다. 임팩트커리어 W는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취업 연계 교육 프로그램이다. 오는 25일까지 온라인으로 1기 참가자를 모집한다. 참가자들은 △디스커버리캠프 △펠로우십 △정직원 전환 평가 등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거친다.
장선문 루트임팩트 디렉터는 “교육 후에는 지원 기업에서 12주 동안 근무하는 리턴십 프로그램 ‘펠로우십’을 진행하고 이후 기업별로 정직원 채용을 결정하는 ‘전환 평가’가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참가자들은 대체로 출산, 육아 등 공통 관심사가 있을 것”이라며 “공통 관심사를 바탕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돕고 ‘자녀 돌봄 서비스’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