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청년들의 ‘딴짓’을 키워라… 대학 기부 트렌드, HW에서 SW로

지난 11월 27일, 사회적기업 ‘베어베터’ 김정호 대표는 5억6554만원을 고려대에 기부했다. 1990년 고려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김 대표는 네이버 공동 창업자이자 한게임 대표를 지냈던 기업가 출신으로, 지금은 발달장애인을 190명 남짓 고용한 사회적기업가다. 김 대표는 이번 기부금 중 특별히 두 프로그램에 1억원씩을 출연했다. 서울 안암캠퍼스 내 창의·창업 전용 공간인 ‘파이빌(π-Ville99)’과 사회 혁신 리더 양성을 위한 ‘글로벌 리더십 프로그램’이었다. 이민구 고려대 기금기획본부 수석은 “학교도 단순 협력보다 ‘소셜 임팩트’, 밑에서부터 변화를 이끄는 ‘빅 체인지’ 등의 키워드로 펀드레이징한다”며 “창의적인 ‘딴짓’이 가능한 공간이나 생태계를 조성하고 함께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해 주는 기부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파이빌 전경. ⓒ고운호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몽구 미래자동차연구센터, LG·POSCO 경영관, 이화·SK텔레콤관 등 대학 캠퍼스에 대기업이나 오너의 이름을 딴 건물을 짓던 기부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건물 신축과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인재 양성과 창업 교육, 사회 혁신 등 프로그램과 생태계 조성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에 기부하는 손이 늘고 있는 것.

연세대는 지난 10월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SK와 사회 혁신 인재 양성을 위한 MOU(업무협약)를 맺고 올해부터 5년간 100억원을 지원받는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은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이 생전에 1974년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이다. 연세대는 2016년 대학 내 ‘글로벌창의인재양성사업단(사회혁신센터)’을 출범하고 올해부터 ‘사회혁신가 인증제’ ‘글로벌 이노베이션 투어’ 등 사회 혁신 인재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는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에 80억원, 공유 인프라 구축에 20억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2018년 1학기부터 소셜벤처 창업, 사회 혁신 직업 현장 학습 등 대학과 산업을 연결하는 강좌도 개설한다.

SK행복나눔재단도 이화여대와 MOU를 맺고 사회적 경제 석·박사 협동 과정에 장학금·연수·교과목 개발 등을 지원한다. 특히 협동 과정 재학생들에게는 2020년까지 3년간 장학금을 제공한다. 협동 과정 주임교수인 조상미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SK행복나눔재단은 최근 이대뿐 아니라 사회 혁신 인재를 양성하는 10여 곳 대학들과 ‘사회 혁신 교육자 네트워크(ENSI)’를 구축하기도 했다”며 “대학들도 사회 혁신 방향으로 인재 양성을 고민 중인 곳이 많다”고 말했다.

연세대·한국고등교육재단의 미래형 사회혁신 인재 육성 사업 협약식 장면. ⓒ 연세대

동아시아 대학 중 최초로 글로벌 사회 혁신 대학 커뮤니티인 ‘아쇼카U’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한양대에도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청소년을 사회 혁신가, 사회적 기업가로 양성하는 비영리단체 얼반유스아카데미(UYA)는 지난 6월 “사회 혁신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써달라”며 1억2000만원을 한양대에 쾌척했다. 아쇼카한국, 루트임팩트, 크레비스파트너스 등 사회 혁신 기관은 한양대와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운영하기로 했다. 이호영 한양대 사회혁신센터 담당자는 “사회 혁신과 관련 인재 양성에 기부하겠다는 이들의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지난해 3월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도록 24시간 제조장비·회의실·운영 인력·교육 프로그램 등 인프라를 제공하는 ‘해동아이디어팩토리’를 열었다. 드론을 이용해 네팔 지진 현장 등을 맵핑(mapping)해 ODA 사업을 돕는 소셜벤처 ‘엔젤스윙’도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서울대 기획팀 관계자는 “해동아이디어팩토리도 한 개인 기부자의 15억 고액 기부로 시작됐다”며 “기존에 건물 신축이나 재건축 등에 기부하는 경향이 많았다면 최근엔 프로그램에 기부하는 분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한편 일찍이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 기부가 활성화된 해외는 사회 혁신 투자도 적극적이다. 이베이의 공동 창립자인 제프 스콜(Jeff Skoll)이 대표적 예다. 그가 설립한 스콜 재단(Skoll foundation)은 2003년 영국 옥스퍼드대에 약 800만달러를 기부해 ‘사회적 기업가 정신 스콜 센터’를 설립했다. 이후 이곳은 ‘스콜 월드 포럼’ ‘스콜 어워드’ 등으로 전 세계 사회적 기업가와 투자자 등을 연결하고 투자하는 주축 역할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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