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 여러 가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모임이 많다. 언제부터인가 네 명 이상이 참여하는 모임에 되도록이면 가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럿이 모이면 가벼운 일상 안부와 직장 이야기 그리고 사회 안팎의 정치이야기를 하며 실속없이 겉도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까왔다. 하지만 모든 비즈니스 네트워킹의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 H 회사의 송년회는 우리의 스폰서 기업이기도 하고 대표님이 직접 초청하였기에 거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의 잔치이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뒷자리에 얼굴 도장만 찍고 올 계획이었다.
“도착하시면 알려주세요?”
담당자의 SNS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내가 VIP도, 직원도 아닌데 나까지 챙기실 것까지 없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행사장에 도착하였다. 아뿔싸, 호텔 연회장 메인 한 가운데 테이블에 그것도 회사 대표님의 옆자리로 앉게 되었다. 그 테이블에는 한 해 동안 그 기업과 사회공헌 활동을 열심히 진행한 비영리 단체장들이 함께했다. 회사의 지난 일 년 간의 업적과 성취를 축하하며 직원들과 그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300여명이 넘는 대규모 사내 송년회 자리에 비영리 협력 단체들을 초청한 것도 고마운데, 헤드 테이블에 좌석을 배치한 것은 풋풋한 배려로 느껴졌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행사 내내, 단 한 번도 사장님, 전무님, 상무님과 같은 직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금년 장기근무근속상은 누구 누구‘님’께서 수상을 해주시겠습니다”와 같이 직함을 생략하고, ‘님’이라고 만 하여 직장 내 지위고하를 알 수가 없었다. 아울러 사장을 위한 동선 파악과 자리 배치 그리고 특별한 사진 촬영도 없었다. 사장이 직원처럼 모두가 평등한 모습으로 송년회를 즐기고 있었다. 성공한 기업의 핵심은 수평적 의사소통이라고들 하는데,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송년회에 빠질 수 없는 게임과 행운권 추첨에서 나는 옆에 앉은 외국인 대표로부터 게임 벌칙금 1만원을 받는 행운(?)을 얻었다. 물론 옆에 한국인 통역이 있었으나 게임의 규칙과 결과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이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끝날 무렵 돈을 돌려드렸다. 그는 올 연말의 행운은 나에게 가는 것 같다고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돈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서명을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한국 돈에 서명을 했다. 우리는 함께 돈을 들고 사진을 찍으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 했다. 나도 그를 배려하였고 그도 나를 배려한 듯했다. 상호배려하며 마음의 벽을 허물며 가족의 휴가계획과 자녀 교육문제까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며 첫 만남이라 어색했던 분위기는 곧 사라졌다.
사실 우리는 연공서열과 권위주의적 기업문화 때문에 소통 비용을 많이 지불하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 수평적 소통과 투명한 정보 공유, 직원의 자율성은 성공하는 기업의 주요한 3가지 원칙이기도 하다. 여기에 성 차별(sexism), 연공서열(ageism), 인종차별(racism)이라는 한국 사회가 가진 3대 적폐를 청산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사회가 될 것이다. 송년회가 끝난 밖에 눈이 내렸다. 모처럼 배려라는 치유의 키워드 덕분에 큰 모임에 대한 우려를 털어내고 힐링된 기분으로 뽀드득 눈길을 밟았다.
현재 비영리 국제 청소년 경제교육 기관인 Junior Achievement Korea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2002년, JA Korea의 한국 설립과정에 참여하여 연간 10만 여명의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시장경제와 금융교육, 창업교육 그리고 진로 및 직업교육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서강대에서 종교학 학사와 정치학 석사 취득, 영국 외무성 췌브닝 장학생으로 King’s College London에서 전쟁학 석사를 마쳤으며 경기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민간외교포럼인 아린(我隣), 미국 국무성 교환프로그램, 오스트리아 Global Salzburg Program, EU Visiting Program등 다양한 민간외교활동에도 참여했다. 저서로는 “동아시아 전쟁기억의 국제정치”, “영화 속의 국제정치”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