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반빈(Peter van Veen) 영국투명성기구 기업 이슈 총괄 인터뷰
피터 반 빈(Peter van Veen) 영국투명성기구(TI UK) 기업 이슈 총괄은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핵심 키워드로 ‘투명성’을 꼽았다. 1993년 설립된 국제투명성기구(TI)는 반부패 이슈를 다루는 비정부기관(NGO)으로, 매년 국가별 부패지수를 발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 지부를 포함해 100여개 이상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 청렴도 점수는 100점 만점에 53점. 176개국 중 52위로, 지난해 37위(56점)보다 15계단 하락했다. 1995년 국제투명성기구의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 조사 시작 이래 가장 낮은 순위다. 한국 기업의 투명성 지수도 최하위다. 영국투명성기구가 47개국 163개 방산기업을 대상으로 투명성과 윤리정책 등을 평가해 반부패지수를 산출한 결과, 조사대상에 포함된 한국 기업 6곳이 저조한 점수를 받은 것. A(공개도 가장 양호)부터 F(공개 거의 없음)로 분류되는 등급에서 대우조선해양은 C등급, 삼성테크윈은 D등급, 두산DTS와 LIG넥스원은 E등급을 각각 받았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와 풍산은 최하인 F등급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기업의 투명 경영 강화와 반부패 척결을 역점 과제로 세운 만큼, 국내 기업들의 대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 22일 유엔글로벌콤팩트(UNGC) 한국협회와 주한영국대사관, 주한영국상공회의소가 함께 개최한 ‘준법, 윤리경영 페어플레이어클럽 세미나’ 특별 연사로 한국에 첫 내한한 피터 반 빈을 만나, 글로벌 CSR(지속가능경영) 트렌드를 들었다. 피터 반빈 총괄은 거대 석유 기업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 글로벌 컨설팅그룹 엑센츄어(Accenture) 등을 거쳐 영국투명성기구에 합류한 기업 리스트 전략 및 윤리경영과 반부패 전문가다.
—부패 스캔들은 기업의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무리 상품이 훌륭하고 브랜딩이 잘 된 기업이라도, 부패 스캔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패 이슈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이렇게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2006년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독일 기업 지멘스(Siemens)는 미국 법원에 8억 달러의 벌금을 냈고, CEO 교체를 비롯해 많은 내홍을 겪었다. 과거 지멘스는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은 최고의 기업으로 꼽혔는데, 뇌물 스캔들 직후 같은 랭킹에서 순위가 엄청나게 하락했다. 또한 부패 리스크의 여파는 10년 넘게 지속됐다. 지멘스처럼 전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다국적 기업의 경우, 소송이 각국의 법원에서 연쇄적으로 맞물려있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지멘스는 뇌물 사건을 둘러싼 마지막 소송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미디어에서도 해당 이슈를 10년 넘게 다뤘다. 더 큰 문제는 새로운 CEO가 과거 경영진의 뇌물 사건 등 부패 이슈 때문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는 점이다. 2008년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경영자 4명은 카타르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사기를 공모한 혐의로 기소를 당했다. 소송이 진행된 지난 10년간 CEO가 총 4번 바뀌었다. 현재 CEO가 무려 과거 4번째 경영진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개선을 해나가야하는 부담을 안게된 것이다. 이렇게 한 번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최근 한국에도 커다란 정치 부패 스캔들이 있었다. 이후 전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과 거래해도 되는가”라는 문의와 검토가 쇄도했다. 국가의 부패 리스크는 기업의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와 기업간 부패 스캔들은 국민들로부터 선출된 정치인뿐 아니라 기업 전반에 대한 신뢰도를 한꺼번에 떨어뜨린다. 국제투명성기구의 조사에 의하면, 정부와 기업의 관계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도는 굉장히 낮다. 기업이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기위해 뇌물을 준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업의 부패 스캔들은 조직 내외부 전반에 타격을 입힌다. 회사에 대한 실망감으로 좋은 인재들이 떠나고, 실력있는 젊은 인재들의 영입이 어려워진다. 또한 타국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할 때 부패 스캔들 이력이 계약을 성사시키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정치적인 스캔들에 휘말리는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불투명성’에서 비롯된다. 국제투명성기구는 정치인을 언제, 왜 만났으며 어떤 로비를 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것을 독려하고 있다. 기업과 정치인간의 상호교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 경제를 확립해나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치인이 정책을 만들 때 기업의 환경과 니즈를 올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민주적인 절차 아래에서 대중과 기업들이 정치인과 투명하게 교류할 수 있어야한다. 이러한 정보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면, 대중들은 기업이 정치인에게 특혜를 얻기 위해 로비를 한다고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질 높은 제품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던 한국 기업들이 이러한 부패 스캔들로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부패 리스크를 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뇌물 사건으로 실추된 기업 이미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실제 이를 해결해나간 글로벌 기업 사례가 있는가.
“앞서 말한 지멘스가 좋은 예다. 부패 스캔들 이후 지멘스는 지속가능경영 최고 책임자인 ‘CSO(Chief Sustainability Officer)’를 임명, 비즈니스 전반에 걸쳐 준법 시스템을 개선하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또한 전 세계 기업들의 준법 및 윤리경영 개선을 위해 세계은행과 함께 1억 달러(약 1134억원)를 조성해 24개국에서 국가별·지역별·업종별 맞춤형 준법 및 윤리경영 교육, 연구, 자가진단 등을 지원하는 ‘지멘스 청렴성 이니셔티브(Siemens Integrity Initiative)’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페어플레이어클럽(Fair Player Club)’ 이니셔티브를 결성해 벌써 125개 넘는 공기업 및 민간기업들이 공정하고 투명한 비즈니스를 위한 반부패 서약에 동참했다. 지멘스의 경우 뇌물 관련 후속 보도와 함께 부패 척결을 위한 개혁적인 프로젝트들이 함께 이슈화되면서, 이미지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 불법 리베이트로 중국 정부로부터 사상 최대 벌금인 5000억원을 부과받은 다국적 제약회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2년간 반부패법 준수 여부를 보고하고, 이후 정부 및 정치인과의 의사소통 및 로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뇌물과 부패 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지고 있고, EU 회원국 대부분 유엔반부패협약이나 OECD 뇌물방지협약에 가입하는 등 부패 방지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반부패 이슈를 둘러싼 글로벌 트렌드가 궁금하다.
“전 세계 주요 수출 시장을 중심으로 반부패 준수사항이 투자나 무역에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기업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반부패에 강했던 미국, 영국뿐 아니라 최근 10년새 러시아, 중국 등 신흥국도 강력한 반부패법을 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한 번의 뇌물 사건으로 여러 국가의 반부패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자회사를 가진 다국적 기업이 부패 소송에 휘말리면, 해당 기업의 타국 지사들도 동시다발적으로 감찰 및 조사를 받게되는 것이다. 실제로 비행기 엔진 생산업체인 롤스로이스는 인도네시아, 인도, 브라질 등 7개국의 반부패 관련 협약을 위반했는데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만 1억2000만 달러(약 1361억원)가 들었다. 이렇게 국제 분쟁은 굉장히 복잡하고 엄청난 비용을 발생시킨다. 각국의 반부패법을 분석하고,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법을 기준으로 기업의 준법 시스템을 구축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한국 기업이 외국 당국으로부터 부과받은 과징금 규모는 3.3조원. 미국으로부터 1조7133억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로부터 약 1조544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 현재 약 7000여개의 국내 법인이 유럽연합(EU)에 진출해있는 만큼, 보다 선제적인 글로벌 반부패법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반부패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해야하는가?
“최고경영진의 강력한 메시지가 가장 중요하다. CEO가 직접 반부패 의지를 천명하고, 노력해야한다. 단순한 홍보용 문구에 그쳐서는 안된다. 직원들이 왜 부패 리크스가 중요한지 인지하고 공감해야한다. 즉 깨끗하고 공정한 비즈니스, 윤리경영을 지지하는 조직문화가 형성돼야한다. CEO 등 고위 경영진의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거나, 언행이 일치되지 않으면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 미국, 영국의 대기업들은 모든 임직원을 대상으로 반부패 교육을 하고 있다. 온라인 트레이닝을 기본으로 하되, 뇌물 리스크가 높은 국가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에겐 대면 교육을 실시한다. 본사는 물론 협력업체 직원들도 같은 교육을 받는다. 영국, 미국은 협력업체 등 대리인이 기업을 대신해 뇌물을 지급해도, 해당 기업에 책임을 묻고 있다. 단순히 준법 관련 행동강령을 전달하고 지켜달라고 해봤자, 이를 제대로 실행할 중소기업은 거의 없다. 전문성과 경험, 비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업체를 교육하고 전체 역량을 강화시키는 시스템을 마련해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직원을 파견하기도 한다. 영국투명성기구엔 반부패 관련 400여개 항목을 기업별로 서로 배우고 벤치마킹하는 제도가 있다. 이들은 매년 더 나은 투명 경영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투자를 늘리고 있다.”
—조직문화나 인센티브를 어떻게 개선해야, 부패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까?
“합리적이고 적절한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면, 누군가 편법을 쓰거나 뇌물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격적인 영업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이러한 조직문화는 부패를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법규를 준수하지 않은 직원이 있다면 승진에서 누락시키고, 직원들의 윤리적인 업무를 위해 적절한 인센티브를 설정해야한다. 이에 GSK, HSBC, 영국 바클레이 은행 등은 판매원들의 인센티브 제도를 개선했다. 예전엔 실적만 맞추면 보너스가 지급됐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고객의 자금을 세탁하는 방식으로 보너스를 받는 직원들이 많았다. 이에 불법행위로 인해 실적을 높인 경우, 해당 보너스를 환급하도록 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손해가 되더라도, 장기적으로 고객에게 이익이 될 경우 직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제도도 만들어졌다.”
—새 정부를 출범한 한국이 사회적책임을 강조하는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려면, 어떤 대비가 필요할까.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생각한다. 재벌기업 회장들이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개혁을 선언하고 앞장선다면, 이러한 변화는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를 위한 윤리경영 가이드라인 마련과 지원을 지속한다면, 중소기업들도 지속가능경영을 하며 성장할 수 있다. 한국 기업이 기술적 혁신에서만 명성을 쌓을 것이 아니라, 윤리경영 및 지속가능경영 부분에서도 신뢰를 얻게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