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팩트 투자를 시작하려면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임팩트 투자자들은 ‘어쩌다’ 임팩트의 세계로 첫 발을 디디게 됐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임팩트 투자자 4명의 ‘자기 고백’시간이 마련된 것. 이덕준 D3쥬빌리 대표,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 윤훈섭 스타트업앤젤클럽 대표, 케이 하레야마 록클라이밍파트너스 대표가 ‘임팩트 투자’를 시작하게 된 저마다의 스토리를 풀었다.
◇이덕준 D3쥬빌리 대표
“D3쥬빌리의 중요한 미션은 ‘임팩트 투자자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팩트 투자는 딱히 교과서도 없고,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쉽지 않다. 그래서 각자의 경험을 공유해달라고 몇 사람께 미리 부탁을 드렸다. 제 스토리부터 시작하겠다.
제가 직접적으로 임팩트 투자를 시작한 것은 2010년, 2011년이었다. 이철영 ARK사모펀드 회장님을 비롯해 여러 해외 투자자들도 만나고, 같이 따라 투자를 해보면서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건 직접적으로 시작했던 6~7년전보다 훨씬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부터 30년도 전 이야기다. 1986년도에 제가 대학교 4학년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무슨 직업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보다 ‘지금까지 공부한 이유가 무엇이고, 졸업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계속 물었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당시 마음 맞는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가난한 동네에 가서 살면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이웃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행했다. 달동네에 들어가 집을 얻었고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 달동네에는 일용직 노동자, 실업자, 환자,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 등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 구석에서 언제든지 마주칠 수도 있는 이들이었지만 주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철조망은 없지만 분리된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 동네에서 저희는 아이들 방과후 공부방을 운영하고 우기 닥치기 전에 축대를 쌓고, 집에 벽지를 바르고. 아픈 사람 있으면 병원에 데려가고. 영양 부족한 아이들 보면서 두부 만들어 먹이려고 직접 두부도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부가게가 첫번째 창업이었던 셈이다. 당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는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빈부차가 심해지던 시기였다. 또 80년대 이후 군부정권에 의해서 표현의 자유도 없었고 비 민주적인 사회였다. 참지 못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직접 선거로 대통령 선거하는 시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당시 다니던 직장 병행하다가 관두고 풀타임 활동가로 전업했다. 그런데 사회가 변화하는 것 보다 우리가 먼저 지쳤다. 20대 청년들이 꿈꾸던 것에 비해, 준비가 부족했다. 조직이 지속가능하지 못했고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가 살던 달동네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희가 경찰에서 내사를 받고 있었다. 이후 바로 체포됐고, 삼일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취조를 하더니 사건이 조작됐다. 그때부터 한 5개월 반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이후에 집행유예로 풀렸고 한참 뒤에는 사실상 무죄로 판결이 났는데, 사회에서는 한번 찍히면 모든 정상적인 기회가 사라진다. 저도 그렇게 될 뻔했는데 신기하게도 저에게는 다른 여정이 시작이 됐다.
해외에 가서 공부하게 됐고 투자은행에서 금융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 이후에는 다시 전자 상거래 회사로 가서 최고재무책임자(CFO)역할을 했고, 회사를 나스닥 상장하고 이베이(eBay)에 매각하게 됐다. 그러면서 2010년에 앤젤투자자가 됐다. 당시 여러 해외 임팩트 투자자들 만나면서 저도 ‘임팩트 투자’를 처음으로 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25년이 된 시점에서 걸어온 지난 길들이 연결된 것을 느꼈다. 이 여정을 거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말자,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자, 의미를 끝가지 쫓아가보자.’ 금융이든 사업이든 특권층 소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할 때 의미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임팩트 투자는 제게 그런 의미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
“라임자산운용에서는 6000억원 상당을 운영하고 있고, 행사에 오기 직전까지도 계속 매매를 하다가 왔다. 헤지펀드라고 소개하면 투기꾼 같기도 하고 돈 벌기에 혈안이 됐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게 십년간 해오다가 2년전에 ‘스파크랩’에서 하는 ‘스타트업 데모데이’ 행사에 갔다. 거기서 트리플래닛이라는 스타트업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됐다. 트리플래닛은 전 세계에 나무를 심는 스타트업이다. 환경과 사람, 사회의 가치를 나무에 담아서 세상에 심는 혁신 기업이다. 팬클럽이 돈을 모아서 나무를 심기도 하고, 중국이나 몽골 사막에 가서 나무 심는 등 사람들의 참여를 자발적으로 이끌어낸다. 당시 저는 이 회사의 발표 듣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트리플래닛은 지금 11개국 53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아직 대표가 젊다보니 경영이나 사업 방향이 흔들리는 부분이 제법 있지만, 여러모로 돕고 있다. 사회적기업 중에서도 돈 버는 곳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투자한 곳은 ‘제너럴 바이오’라는 곳이다. 직원의 3분의 2가 장애인이고 사회생활용품이나 보조식품 등을 제조한다.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데 상당히 잘 하고 돈도 잘 번다. 내년 가을에는 IPO할 계획도 갖고 있고 증권사 통해서 준비하고 있다.
저희가 하는 헤지펀드도 연4~5%의 수익을 받아가면서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고, 좋은 일 하면서 돈도 받는 모델을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11월 중순에 헤지펀드를 내는데, ‘행동주의 펀드’를 처음으로 내 보려고 준비중이다. 최순실 게이트 전에 다 만들었는데 이름을 ‘라임 민주주의 펀드(Lime Democracy Fund)’라고 붙였다. 단순히 돈 버는 것 이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해보려 노력 중이다.
◇윤훈섭 스타트업 X 엔젤클럽 대표
“이덕준 대표님 때문에 김이 좀 샜는데 앞에 띄운 게 30년 전 사진이다. 1987년도 사진인데 당시 대통령 불공정 선거와 관련해서 현장이 뜨거웠던 때였다. 저도 사진 속 구석 현장에 앉아있다. 임팩트 투자에 대한 직접 투자를 실행한 건 D3쥬빌리의 도움을 받아서 하게 됐다. 일단은 정신적인 준비나 마음가짐 부분은 역사가 좀 됐다. 당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한 열정,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 당시 이야기를 처음 하는데, 당시 사진 속에 앉아있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서 사회를 바꾸고 헌법도 바꿨다. 우리가 사회를 바꿔냈다는 것 자체가 큰 경험이었고 자신감이 붙었다. 아직도 좋은 경험으로 남아있다. 저 때 연애도 해서 배우자 만났고 잘산다. 이때 사회적으로 1차 각성이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자본 모으고 축적하면서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다음은 제가 투자하는 몇 회사들인데 하나는 ‘파슬렛’이라는 곳이다. 농민들이 좋은 로컬푸드를 생산하는데, 직거래 시스템을 개발해서 도시 소비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걸 목표로 하는데 가장 마지막 단에는 저소득계층 사회적기업을 창출하는 임팩트까지 있었다. 이 회사가 자금난이어서 엔젤클럽에서 1차 엔젤투자하고 크라우드펀딩까지 지원했다. 지금은 정상궤도에 올랐다. 이 회사는 한국 농 특산물에서 처음으로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한 곳이다.
‘프라미솝’은 D3쥬빌리 소개를 받아서 투자했던 곳이다. 이 회사 대표님 아들이 희귀난치성 질환을 갖고 태어났는데, 병원 치료를 장기간 하다가 의료 비대칭성의 문제를 깨닫고 창업을 한 경우다. 재활치료시장에서 데이터 혁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한 곳이다. D3쥬빌리, 청년창업투자지주(청년창투) 등에서 투자를 진행했는데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자금이 적게 모였다. 그래서 인하대 교수님과 함께 IR을 붙이고 투자금을 모았다. 앤젤 매칭제도를 이용해서 원래 생각했던 투자 금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파슬린 이나 프라미솝 둘 다 회사 자체로도 경쟁력이 있고 지속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투자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에게는 작은 돈이었지만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가 아니었으면 이 회사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이루는 데서 훨씬 더 힘들었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일반 기업에 투자할 때는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아직 임팩트 투자는 초기단계이고 ‘엔젤투자’나 ‘소설벤처 투자’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작게라도 꾸준히 투자할 수 있는 개인투자클럽을 만들어가겠다고 멤버들과 다짐하고 있다. 좀더 좋은 투자 클럽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겠다.”
◇케이(Key) 록클라이킹파트너스(Rock Climbing Partners)
“국적은 일본인이지만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고, 유럽 전반에 걸쳐서 임팩트 투자를 하고 있다. 현재 15개 정도의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주로 다국적 기술 기업에 투자했다.
오늘의 주제가 ‘내가 어떻게 임팩트 투자를 시작하게 됐냐’ 인데, 그리 쉬운 질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2004년이래로 계속 기업가였고 내 스스로도 투자를 회수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딱 언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일본에서 2011년 3월에 동일본 대지진이 큰 전환점이긴 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후쿠시마 원전을 덮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난다. 당시 나는 동경에서 개인 인터넷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든 쓰나미 회복을 위한 복구작업에 기여하고 싶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투자금을 보다 사회적인 목적으로 쓰게 됐다.
2013년부터는 사회적 투자나 임팩트투자라는 기회를 계속 모색하면서, CSR·CSV가 아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임팩트 투자에 있어서 가장 큰 시발점을 미국에서 만났다. 그때는 임팩트 기업, 사회적인 기업에 대해 힘겹게 고민하던 때였다. 2016년에 대표적인 임팩트 투자 컨퍼런스인 소캡(SOCAP) 컨퍼런스에 참여했는데, 대부분이 미국 투자자들이었다.
세가지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전통적인 자본이 효과적이지 않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임팩트투자는 훨씬 더 복합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나는 내 개인 펀드를 운용하지만 동시에 사회적기업가를 지원하고 컨설팅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전략적인 부분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임팩트투자의 실질 사례를 많이 만들어내야 할 것 같다. 스타트업에 있어서 예전에 제가 500개 정도 사례를 만들어 내는 데 초점을 맞췄는데, 이때는 스타트업이 사회에서 유니콘 같은 역할을 했다. 저는임팩트 투자 시장과 기존의 전통적인 기업이 제대로 융합된다면, 그래서 사회적 기업가가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면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어느정도의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하는지도 재평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