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위성 개발자서 스타트업 ‘프라미솝’ 창업한 이준호씨
이준호(37·사진)씨의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조금 달랐다. 병명은 ‘선천성 거대 모반증’. 신생아 약 2만명 중 한 명꼴로 발견되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이씨의 아이는 머리 부분에 커다란 점 같은 모반(母斑)이 많이 퍼져 있어, 뇌로 파고들면 생명까지 위험해지는 수준이었다. 태어난 지 2주 만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국내에서 선천성 거대 모반증의 권위자라고 소개받은 의사였기에, 그의 말이 곧 신이 내린 말이었다. 의사는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마침 그 시기에 해당 의사 선생님이 개인 병원을 개원했어요. 마취실도, 입원실도 없었어요. 생후 2주 된 애를 마취도 없이 수술을 했는데, 괜찮은 줄 알았어요. 2시간 동안 울면서 수술을 받았어요. 그게 유일한 치료길인 줄 알고 참았죠. 바보같이 1년 반을 그 선생을 믿고 따라가다가, 크게 부작용이 났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네 새끼면 그렇게 할거냐고요.”
수술날이면 치료 부위를 소독하고 드레싱하는 것도 이씨와 와이프의 몫이었다. 아들은 통증에 몸서리를 쳤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망과 외로움에 우울해졌다. 설상가상으로 4000만원이 든다던 치료비도 1억원 넘게 청구됐다. 여러 논문을 찾아봤더니, 담당 의사의 치료법에 대해 부작용 논란도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아빠가 있나.’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이씨는 데이터 분석을 기초로 한 정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하게 됐다.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제2의 삶
사실 이씨는 잘나가던 인공위성 개발자였다. 그는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석사 출신으로 인공위성의 핵심 기술인 자세 제어 시스템을 개발하던 엔지니어였다. 지난 2013년, 7년간 몸담았던 인공위성 업계를 떠나 돌연 스타트업 ‘프라미솝(Promisope)’을 창업했다. 그의 인생 2막은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됐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영국 유학길을 떠났겠지만, 이씨는 아이의 치료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시행착오를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 희망을 약속한다는 의미로 약속(promise)과 희망(hope)의 합성어인 ‘프라미솝(promisope)’이라고 법인명을 지었다. 먼저 ‘히어아이엠(hearIam)’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환자 보호자로서의 아이의 치료 과정을 공유했고, 해외 사이트를 뒤져서 ‘선천성 거대 모반증’ 질환과 관련된 정보를 끌어모았다. 각종 의료 정보 사이트에 메일도 보내고, 독일의 의료 정보나 치료법도 구글 번역기를 돌려 내용을 공유했다. 블로그 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환자 보호자들이 비밀 댓글로 각자의 경험과 상황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장애·희귀·난치성 질환 관련 의학 정보를 공유하고 네트워킹할 수 있는 폐쇄형 커뮤니티를 비즈니스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사업 모델에 대해 자문을 받았더니, 대부분 ‘비영리스럽다’는 반응이더군요. 오히려 ‘캐시카우(cash cow·확실히 돈벌이가 되는 상품이나 사업)’를 만들 수 있는 사업을 창업하고, 환자 보호자 커뮤니티 운영을 돕는 게 낫지 않으냐는 조언을 받았어요.”
첫 번째 사업 아이템으로, 실사용자 리뷰 서비스 ‘드리즐(driizzle)’을 론칭했다. 수많은 제품과 과장된 소비자 리뷰 속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제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미였다. 의료 정보에서 소외됐던 이씨 본인의 경험도 어느 정도 녹아 있었다. 미국 최대 지역 및 음식점 리뷰 사이트 ‘옐프(yelp)’를 벤치마킹한 모델이었다. 경력 13년의 삼성 출신 해외 마케터, 베테랑 개발팀, 디자이너 등 총 15명의 대규모 인원으로 팀을 꾸려 사업을 시작했지만, 시장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3개월 만에 문을 닫았어요. 완전 실패죠. 돌이켜보니 막무가내로 했었던 것 같아요. 거창하게 시작하면서 돈도 금방 다 떨어졌어요. 유아용품과 음식점 리뷰를 뚫으려고 했는데, 그 방법을 못 찾았어요. 몰라도 너무 몰랐어요.”
15명 중 공동창업자와 이씨, 그리고 디자이너 3명만 남게 됐다.
◇한 번의 실패, 임팩트 투자자를 만나며 ‘재기’에 성공
아이의 치료 과정은 현재진행형이었고, 블로그도 계속 운영하고 있었다. 갈수록 환자 보호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국에서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 60명 중 30명의 보호자가 네트워크에 가입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투자자가 ‘돈이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폐쇄형 커뮤니티 비즈니스에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투자자를 만났다. 바로 임팩트 투자기관 ‘D3쥬빌리’의 이덕준 대표였다.
“당시 사업 모델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 대부분 ‘돈은 못 버시겠지만 응원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덕준 대표님은 2개월 동안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온다면 초기 투자까지 고려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씨가 구상했던 커뮤니티의 핵심 메커니즘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 플랫폼을 환자 및 환자 보호자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만들고, 커뮤니티 내에서 비슷한 부류의 환자들을 매칭해주는 것. 이씨는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보호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풀어내는 것을 어려워한다”면서 “최대한 비슷한 그룹끼리 모아줘야 긍정적인 피드백이 오고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심리 상담, 특수 교육 콘텐츠 등 다양한 영역과의 접점을 만들며 비즈니스를 풀어나갈 계획이었다. 이씨는 인공위성 개발자 출신이긴 했지만, 웹 개발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는 트위터를 벤치마킹해 ‘루비온레일스(Ruby on Rails)’라는 개발 언어를 배우고, 생활코딩 웹사이트 동영상 강의로 도움을 얻으면서 직접 웹 개발에 착수했다. 하루 배워 하루 적용하기를 2개월. 이덕준 대표에게 프로토타입을 선보였고, 초기 투자 2500만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2016 아쇼카펠로 선정 “이용자 중심의 치료 생태계를 만들겠다”
비즈니스로서의 성장 가능성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했다. 일주일에 한 번, 봉사활동을 하러 방문하던 장애인복지관에서였다.
“매주 얼굴이 보이니까, 어느 날 재활팀장님이 뭐하시는 분이냐고 묻더라고요. IT 기업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다짜고짜 홈페이지 제작 좀 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건 더 싸게 잘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말하니, ‘더 어려운 것도 개발할 수 있느냐’며 ERP(Enterprise Resources Planning·생산, 판매, 인사, 회계 등의 데이터를 통합관리하는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 시스템을 좀 고쳐달라고 했어요. 90년대 초반에 윈도 기반 솔루션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긴 한데, 사용하기가 너무 불편하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재활 치료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할 수 있다면, 사용자 중심으로 치료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겠구나.’ 아이의 치료 과정을 겪으면서 의분(義憤)을 품었던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의료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환자 중심의 정보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는 솔루션을 만들기로 했다.
먼저, 발달 장애 아동과 보호자를 위한 재활 치료 정보를 수집-기록-공유하는 원스톱 정보 시스템 ‘케어플(careple)’을 개발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은 이 시스템을 무료로 사용하고, 기관에서 매달 사용료를 지불하는 구조다. 환자들은 자신의 치료 상태와 진료일, 향후 치료 계획까지 웹이나 모바일로 확인할 수 있다. 활동 보조인과 이용자의 차트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올해 하반기 정식 론칭한 ‘케어플’ 서비스는 강원, 경남, 제주 등의 지역에 위치한 15개 복지관에서 사용되고 있다. 장애인복지관에서는 재활 치료 기록을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관리하며 웹, 모바일에서도 치료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돼 업무 효율성도 높아졌다. 프라미솝의 목표는 전국 200여 개 복지관과 1만여 개의 사설 재활치료센터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씨의 아들은 올해로 일곱 살이 됐다. 여전히 1년에 4번 정도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하지만, 많이 호전됐다고 한다. 개인의 아픔을 공개하고,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병폐화된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까지 이르게 한 동력은 무엇일까.
“제 인생이 참 드라마틱하게 바뀌었잖아요? 인공위성 개발자에서 갑자기 기업가로요. 돌이켜보면 환자 보호자로서 갖가지 힘든 일들을 겪었고, 그래서 더욱 이 현실을 바꾸려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댓글 보면 어떤 분은 ‘저희 블로그 오는 힘으로 산다’고 해요. 제가 ‘용기’를 냈더니, 많은 사람이 ‘희망’을 얻고 있는 셈이죠.”
지난달 28일, 이씨는 2016 아쇼카펠로 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아쇼카펠로는 국제 비영리단체 아쇼카가 5단계 선발 과정을 거쳐 선정한 사회적 혁신가로, 3년간 조건 없이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이용자 중심의 치료 생태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데이터가 많아지면, A라는 치료법을 사용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는지 정밀한 분석이 가능해져요. 비슷한 증상을 겪는 환자들에게 몇 퍼센트의 확률로 이 치료법을 추천해줄 수도 있죠. 나와 비슷한 성향과 잘 맞는 활동 보조인을 찾을 수도 있고요. 저희 서비스를 사용하는 복지관에서는 이용자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경쟁력이 생기겠죠. 돈을 지불한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예요. 서비스가 안 좋으면 사람들은 돈을 내지 않거든요. 비영리 같은 서비스를 영리로 운영하는 것은 프라미솝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거예요. 고객에게 정말 필요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일종의 약속이고, 다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