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일)

벽돌 수백장 나르고 700원밖에 못 받는 소녀

배우 이정진의 네팔 자원봉사

벽돌공장 노동자는 대부분이 어린 아이… 기본 교육도 못 받아
꺼이랄리 미래 위해 지속적인 관심 필요

지난 5월 배우 이정진(34)씨가 네팔 오지로 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2009년 방글라데시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그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빈곤아동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올해로 세 번째, 이정진씨는 어김없이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오고 있다. 그가 직접 전해온, 네팔에서 만나고 느낀 나눔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배우 이정진과 학용품·생필품을 선물받은 네팔 꺼이랄리(Kailali)지역의 소년 아준.
배우 이정진과 학용품·생필품을 선물받은 네팔 꺼이랄리(Kailali)지역의 소년 아준.

인천공항에서 7시간의 비행 끝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계속해서 국내항공을 타고 2시간, 다시 차로 3시간을 이동해 최빈국 네팔에서도 더욱 가난한 마을로 꼽히는 꺼이랄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엄습해왔다. 45도를 웃도는 불볕더위, 숨이 턱턱 막혔다.

꺼이랄리는 땅이 척박해 과거 노예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이곳 사람들을 ‘옛날 노예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10여 년 전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꺼이랄리 주민들의 삶은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는 ‘절대빈곤’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는 꺼이랄리에서 급식, 교육, 의료 지원, 소득증대 활동 등 다양한 지원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이전까지 나에게 네팔은 그저 신비롭고 장엄한 히말라야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꺼이랄리와 같은 풍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충격이었다.

도착한 다음 날, 나는 바로 현지 굿네이버스 지부장님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첫 번째로 만난 아이는 연로한 할머니와 살고 있는 13살의 소녀 상기타(Sangita)였다.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방 한 칸에는 최소한의 구색을 갖춘 대문조차 없었고, 썩고 냄새 나는 지붕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부엌에는 한주먹도 채 되지 않는 마른 쌀이 조금 남아 있었다. 상기타의 엄마는 10년 전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인도로 넘어가 새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할머니의 삯바느질만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지만 최근에는 일감이 없어 그마저도 어렵다고 했다.

나와 일행들은 다가오는 우기를 대비해 썩은 지붕을 걷어내고 거센 비바람으로부터 상기타와 할머니 두 식구를 보호해 줄 새 지붕과 튼튼한 문을 만들었다.

셋째 날, 우리는 지역의 벽돌공장을 방문했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속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광경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 족히 열 개는 넘어 보이는 벽돌을, 팔 길이만큼이나 높이 쌓아 나르고 있는 노동자 대부분이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벽돌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7만~11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해방 노예 계층의 아이들 중 절반가량이 아주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굿네이버스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이정진씨가 최빈국 네팔의 꺼이랄리지역을 방문해 할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고 있는 13세 소녀 상기타에게 학용품을 선물하고 있다.
굿네이버스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이정진씨가 최빈국 네팔의 꺼이랄리지역을 방문해 할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살고 있는 13세 소녀 상기타에게 학용품을 선물하고 있다.

벽돌공장에서 만난 소녀 안잘리(Anjali, 13세)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홀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당장에라도 공장을 벗어나 학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안잘리가 처한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당장 해 줄 수 있는 일은 안잘라와 함께 벽돌을 나르는 일이었기에, 우리 일행은 그 일부터 도와주기로 했다.

벽돌을 머리에 이는 순간, 정수리부터 허리까지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상상 이상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도 들기 어려운 벽돌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이 하루에 몇십 장, 몇백 장씩 나르고 있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렇게 고된 노동의 대가가 하루 50루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돈 700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굿네이버스가 처음 이곳을 찾아간 때는 2009년이었는데, 마을이 생긴 이래 첫 구호단체의 방문이었다고 한다. 도움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까지 희망을 전하는 우리나라의 구호단체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우리도 비로소 선진국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돕는 나라’가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꺼이랄리의 실상을 잘 전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꺼이랄리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우리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글을 함께 읽는 독자들도 지구 반대편 절대빈곤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희망찬 미래를 선물하는 일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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