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글에서 나는 한 문장을 미완으로 남겨두었다. 협력의 접점은 늘었는데, 협력의 문법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 문법이 무엇인지 이번에는 나의 경험으로 답해보려 한다.
루트임팩트는 2018년부터 2024년까지 ‘임팩트커리어W’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결혼과 출산, 돌봄으로 커리어의 흐름이 끊겼던 여성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경력단절여성’이 아니라 ‘경력보유여성’으로 불렀다. 그 기간에도 갈등을 조율하고, 한정된 시간을 쪼개 문제를 풀고,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을 내려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채용 플랫폼과 아이돌봄 서비스, 교육 기관과 글로벌 재단, 그리고 이들을 실제로 채용한 기업들이 함께했다. 7년 동안 백 명 가까운 여성이 과정을 마쳤다. 그중 절반 이상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함께한 조직 중 일부는 유연근무제나 출산 보호 제도를 새로 도입했다.
숫자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다음이다. 2021년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경력보유여성 조례를 만들었고, 그 뒤 서른 곳 넘는 지자체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국회는 법률 용어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08년 법에 처음 새겨진 말이 열일곱 해 만에 교체된 것이다. 우리가 함께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법률의 언어가 되었다.
그런데 발코니에 올라 이 여정을 다시 내려다보면,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걸린다. 이 성과 중 우리가 사전에 의도를 갖고 함께 계획한 것은 얼마나 될까.
사실 조례의 확산과 법 개정은 우리가 미리 설계한 경로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니다.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경력단절여성을 경력보유여성으로 호명했고, 새로운 이름이 현실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성동구에서 증명했다. 그 뒤로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 이름을 퍼뜨렸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이 프로그램을 소개했고, 파트너들도 자신의 미션과 사업 맥락에서 이 변화를 밀고 나갔다. 이런 노력이 쌓여 변화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운도 따라주었다. 다만 우리는 각자 알아서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지, 함께 모여 그림을 구체적으로 그린 적은 없었다.
더 오래 걸린 질문은 협력의 방식에 있었다. 우리는 파트너를 모을 때 각자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채용은 채용 플랫폼이, 돌봄은 돌봄 서비스가, 교육은 교육 기관이 맡았다. 효율적인 구성이었고 실제로 잘 굴러갔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의 본업을 가져와 이어 붙인 분업에 가까웠다. 각자가 이미 잘하는 것을 합친 일과, 함께하면서 각자가 달라지는 일은 다르다.
그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은 대개 판을 다시 짜야 할 때 찾아온다. 우리에게는 공동 채용에서 프로젝트 중심의 리턴십으로 프로그램 구조를 크게 바꾸던 때가 그랬다. 바꾼 이유는 분명했다.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채용으로 곧장 이어지기 전에 실무 감각을 회복하고 다시 일하는 자신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사자의 필요를 따라 수정한 것이니 그 결정 자체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돌아보면 다른 질문이 남는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 파트너들과 목적을 다시 맞추는 일까지 대신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근거가 분명할수록 조율하는 쪽은 그 논의를 건너뛰기 쉬워진다. 이미 답을 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을 왜 바꾸는지, 그래서 각자의 역할과 목적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파트너들과 처음처럼 다시 맞춰보는 자리를 충분히 가졌는지,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기능으로 이어진 관계에서는 그런 자리를 생략하기 쉽다. 맡은 기능이 계속 필요하면 논의할 이유가 없고, 필요가 사라지면 조용히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서는 갈등의 소지는 적다. 그러나 갈등이 없다는 것이 협력이 깊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더 다양한 주체와 함께 더 촘촘한 협력 구조를 설계해야 했을까. 한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영국 사우스요크셔의 사례를 보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동 건강 불평등을 풀겠다고 모인 이 지역의 협력팀은 처음에 무력했다. 주거 정책도 임금 수준도 자신들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대화 중에 하나를 발견한다. 그 지역에서 태어난 아기 아홉 명 중 한 명이 퇴원해 집에 왔을 때 누울 침대가 없다는 것. 어떤 아기는 바닥에서, 어떤 아기는 욕조에서 잠들고 있었다. 팀은 거기서 시작했다. 아기 침대를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연구자들은 이런 지점을 ‘진입점’이라 부르며, 큰 문제에 실제로 닿을 만큼 의미 있으면서도 당장 손댈 수 있을 만큼 작아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도 진입점은 잘 찾았다. 여성 고용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통째로 들지 않고, 경력보유여성의 재시작이라는 감당할 만한 크기로 잡았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진입점의 쓸모는 그것이 다른 행동으로 이어질 때 생긴다. 모델이 검증되고 파트너들과 신뢰가 쌓였다면, 그 신뢰로 무엇을 더 할 것인지를 물어야 했다. 자원이 흐르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든, 제도의 언어로 문제를 옮기는 일이든, 파트너들과 문제 정의를 다시 하는 일이든.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프로그램을 더 정교하게 다듬는 쪽으로 답했다.
왜 그랬을까. 협력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장부를 동시에 쓴다. 하나는 내 조직의 장부다. 우리 성과를 증명해야 하고,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며, 이사회와 후원자에게 설명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생태계의 장부다. 하버드의 한 연구진도 같은 현상을 짚었다. 협력의 어려움은 참여자가 두 개의 모자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깊은 협력은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장부에 손실로 기록된다. 목적을 함께 다시 세우면 우리 사업의 경계가 흐려지고, 권한을 나누면 통제력이 줄고, 공을 나누면 우리 이름이 옅어진다. 협력이 얕은 데서 머무는 것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결산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첫 번째 장부 뿐이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또 하나의 의심과 싸웠다. 중간지원조직이 판을 조율해야 한다는 생각, 이른바 백본 조직 모델에 내가 너무 기대어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찾아보니 이미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조율자가 네트워크를 대신해 말하는 자리가 반복되면서 점차 왜곡된 권력 구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본 조직에는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임팩트커리어W가 마무리된 것은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후원이 종료되는 시점이었고 우리의 문제의식도 경력보유여성 당사자에서 이들을 맞이하는 조직 쪽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는 7년간 쌓인 커리큘럼과 운영 매뉴얼을 공공과 민간의 후속 사업에 옮기는 일에 공을 들였다. 기획 단계부터 함께 앉아 커리큘럼을 이식하고 매뉴얼을 넘겼다. 다만 그것은 상황에 맞춰 내린 판단이었지, 처음부터 준비한 출구 전략은 아니었다. 조율을 잘하는 것과 조율자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콜렉티브 임팩트라는 개념을 만든 이들도 10년이 지난 뒤 자신들의 정의를 고쳐 썼다. 처음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에는 없던 권력과 형평의 문제를 한가운데로 들여왔다. 협력의 문법은 한번 정해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쳐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 7년의 협력에서 무엇이 우리가 의도한 것이고, 무엇이 상황에 맞춰 대응한 것이며, 무엇이 운이 따라준 덕이었는지를 구별해보고 있다. 구별할 수 있어야 다음에는 다르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협력에는 저마다 맞는 깊이가 있다. 목적이 분명하고 기간이 짧은 일이라면 각자 잘하는 몫을 나누는 편이 낫다. 문제는 깊이 자체가 아니라, 지금 이 일에 필요한 깊이를 구별할 수 있느냐다.
우리가 함께 일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함께 일하는 동안 우리 각자가 달라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협력은 판을 바꾸기 시작할 것이다.
※ 본문의 임팩트커리어W 관련 내용은 루트임팩트가 발행한 케이스 스터디에, 영국 사우스요크셔 사례는 블룸버그 하버드 시티 리더십 이니셔티브가 정리한 연구에 바탕을 두었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이사장
필자 소개
2012년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를 공동 설립해 사회·환경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체인지메이커들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를 중심으로 성수동 지역을 소셜벤처 밸리로 만들었고, 임팩트 커리어 플랫폼 및 임팩트 필란트로피를 통해 인재와 자선 자본을 임팩트 조직에 연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혁신 생태계 조성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2022년 오바마 아시아 태평양 리더로 선정됐으며, 루트임팩트는 제4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습니다. 루트임팩트 공동 설립 전에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Bain & Company에서 전략 컨설턴트로 근무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