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년 전의 일이지만 어제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2011년 리비아 내전이 시작되던 날이다. 당시 나는 주리비아 대한민국 대사로 트리폴리에 있었다. 평온하던 도시의 공기는 순식간에 긴장으로 바뀌었다. 거리 곳곳에서 총성이 들리고 공항과 항만이 잇따라 폐쇄되면서 도시의 질서는 빠르게 무너졌다.
대사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리비아 전역에서 일하고 있던 한국인과 한국 기업 직원들의 안전한 탈출이었다. 당시 리비아에는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우리 기업 직원 약 1만4천 명이 체류하고 있었다. 통신이 불안정해지고 공항이 폐쇄되면서 이들의 안전은 순식간에 불확실해졌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공항이 막히면 항구를, 항구가 막히면 육로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현지 정부와 국제기구, 여러 국가들과 협력하며 가능한 모든 탈출 경로를 모색했다. 도시의 긴장은 계속 높아지고 있었지만 탈출 항공기와 선박, 버스에 오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수많은 긴박한 순간을 지나 결국 1만4천여 명을 안전하게 탈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현실을 마주했다. 분쟁 속에서 집을 떠나야 했던 수십만 명의 리비아 시민들, 병원으로 가는 길조차 막혀 치료를 받지 못하던 환자들, 식량과 물을 구하지 못해 불안에 떨던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전쟁과 재난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언제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위기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적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인도주의의 가치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복합적 위기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기후위기와 보건 위기, 식량 불안, 분쟁과 난민 문제가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개발협력은 단순한 외교 수단을 넘어 인류 공동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협력의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는 해외원조의 목적을 ‘경제관계 확대’보다 ‘글로벌 가치 실현’과 ‘개발도상국 빈곤 문제 해결’에서 찾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는 한국 사회 역시 국제협력을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도주의적 가치 실천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빈곤퇴치, 환경 보호,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의 실현 자체가 장기적인 국익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경제적 이익이 단기적 국익이라면, 보편적 가치의 실현은 장기적 국가이익이다. 경제적 성과가 ‘단기적 프로젝트의 달성’이라면, 인도주의적 가치는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주의와 국가이익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상호보완적 가치다.
그동안 국제사회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0.7%라는 목표 아래 빈곤과 불평등,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추진해 왔다. 최근 국제정세 속에서 국익 중심의 접근이 다시 강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국제사회가 함께 쌓아온 협력의 가치와 성과를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역시 국제개발협력 공여국으로서 역할을 확대해 왔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은 ‘혁신과 성과를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와 상생을 실현하는 K-ODA’를 비전으로 제시하고 있다. 글로벌 위기 대응을 강화하고 인도적 지원을 주요 전략으로 포함한 점은 의미 있는 진전이다. 기후, 보건, 식량 위기를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 회복과 자립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방향 역시 국제개발협력의 본래 취지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분명한 원칙이 필요하다. 인도주의적 가치가 국제개발협력 정책의 중심에 자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의 국제개발협력은 ‘자원외교’, ‘경제협력 확대’, ‘상생의 국익’과 같은 국익 중심의 틀 속에서 발전해 왔다. 이러한 접근이 일정한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장기적 국가이익인 인도주의와 보편적 가치 실현에 더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국제개발협력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실제로 보호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애인, 영유아, 빈농, 여성, 소수민족 등 취약계층은 여전히 교육과 의료, 식수와 생계 접근에서 구조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국제개발협력의 목표는 단순한 사업 규모의 확대가 아니라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어야 한다.
인도적 지원 역시 분명한 원칙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식량 위기 대응이나 긴급 지원이 기업 진출이나 경제적 이해와 과도하게 연계될 경우 인도주의의 핵심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 인도적 지원은 언제나 공공성과 인도주의 원칙에 기반해 설계되어야 하며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또한 국제개발협력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와의 전략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정책과 재원을 통해 큰 방향을 제시한다면 시민사회는 현장에서 지역사회와 직접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국제개발협력이 실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제사회의 원조를 통해 오늘을 이룬 나라다. 그리고 이제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경험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발협력은 단순한 원조가 아니라 글로벌 책임의 표현이다. 글로벌 위기의 시대에 한국이 책임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인도주의 가치, 바로 그 원칙이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중심에 서야 할 때다.
조대식 KCOC 사무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