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전략 사이…‘똑똑한 한국형 ODA’의 조건

[인터뷰] 이훈상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재단) 이사

국제개발협력의 기류가 바뀌고 있다. 주요 공여국들이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원조 속도를 조절하는 사이, 한국은 오히려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를 늘리는 길을 택했다. 올해 ODA 예산은 5조3573억원으로, 5년 전(3조7101억원)보다 약 44% 증가했다. 이제 질문은 ‘얼마나 늘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바꿀 것인가’다.

2월 6일 서울 종로구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이훈상 라이트재단 이사는 한국이 이번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에서 ODA 규모 확대에 걸맞은 명확한 철학과 전략 아래 기술 혁신과 개발협력을 연계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예빈 기자

지난 6일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재단)의 이훈상 이사는 “한국 ODA가 숫자 단계를 넘어 역할의 단계로 넘어가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확대된 예산에 걸맞은 철학과 전략, 그리고 기술과 개발협력을 잇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25일 공청회를 열고 ‘제4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2026~2030)’에서 ‘상생형 K-ODA’를 내세웠다. 인도적 지원과 빈곤 감소라는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외교·경제 전략과의 연계를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이사는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보다 분명한 철학과 정교한 필요하다”고 짚었다.

◇ ‘얼마’를 넘어서 ‘어떻게’를 함께 고민할 때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국제사회 기여가 낮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국민총소득(GNI) 대비 ODA 비율은 2024년 기준 0.21%로,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평균(0.33%)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간 예산을 빠르게 늘리며 존재감을 키웠다. 문제는 늘어난 사업과 기관을 어떻게 하나의 전략으로 묶을 것인가다.

이 이사는 “사업도, 예산도 늘었지만 한국이 무엇을 중심 가치로 삼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기관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흩어져 실행되면서 규모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요 공여국 사례를 들었다. 스웨덴은 젠더와 인권을 핵심 가치로 ODA를 설계하고, 독일은 기술 강점을 바탕으로 바이오 연구개발(R&D)과 디지털 헬스를 우선 분야로 삼았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인간 안보’를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보건 분야의 주요 공여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4차 계획이 ICT·보건·과학기술 등 한국의 강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의미가 있지만, 관건은 ‘흩어지지 않게 설계하는 것’이다. 중앙의 정책 기획과 현장의 실행이 하나의 흐름 안에서 연결되지 않으면, 전략은 선언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상생이 길을 잃지 않으려면, ‘가드레일’이 필요하다

이번 전략은 ‘상생’에 초점을 맞춘다. 협력국과 한국이 함께 성과를 얻는 구조는 ODA에 대한 국내 공감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상생이 국익 중심으로만 해석될 경우 개발협력의 본래 목적이 흐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인도적 지원 예산은 2025년 6702억원에서 올해 3355억원으로 줄었다.

이훈상 라이트재단 이사는 6일 인터뷰에서 협력국의 필요를 기반으로 ODA를 설계하고, 최빈국 지원과 분야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적 ‘가드레일’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채예빈 기자

이 이사는 겉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는 ‘하얀 코끼리’ 사업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산 장비를 수출하거나 병원을 짓는 데 그치면, 현지 보건 시스템과 맞지 않아 방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는 협력국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한국의 소프트파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가드레일’이다. 협력국의 필요를 출발점으로 삼고, 최빈국 지원과 분야별 균형이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정책적 하한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성이 큰 중진국이나 대형 인프라 사업에만 쏠릴 경우, 기초보건·식량안보·기초 교육처럼 글로벌 공공재 성격이 강한 분야가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혁신을 결합하는 방법으로 이 이사는 R&D와 ODA, 글로벌 공공조달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 선순환 구조를 제시했다. 수익성이 낮아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결핵·말라리아 같은 분야에 공공 R&D로 먼저 투자하고, ODA를 통해 현장에서 기술을 검증한 뒤, GAVI, 유니세프 등 글로벌 조달 시장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이다. 사망률 감소나 진단율 향상 같은 지표로 효과를 입증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훈상 라이트재단 이사는 R&D-ODA-글로벌 공공조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도의 큐어.ai는 게이츠재단 지원으로 기술을 개발한 뒤 USAID의 ODA와 와 글로벌펀드 조달 체계를 통해 여러 국가 결핵 대응 프로그램에 도입된 대표 사례다. /큐어닷AI

해외에서는 이미 이런 경로가 작동하고 있다. 인도의 AI 기반 결핵 진단 기업 ‘큐어닷AI’는 게이츠 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기술을 개발한 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ODA 조달 카탈로그에 포함됐다. 해당 기술은 일본 후지필름의 이동형 엑스레이 장비와 결합돼 10여 개국의 결핵 대응 프로그램에 도입됐고, 이후 글로벌펀드 조달 체계를 통해 활용 범위를 넓혔다. 글로벌 보건 공공조달 시장에 진입한 이후 큐어닷AI는 연 매출이 60~70% 성장했고, 기업가치는 약 2억6000만 달러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공조달을 통한 확산이 기업 성장으로 이어진 사례로 꼽힌다.

이 이사는 “진단기기나 AI 솔루션은 한국도 충분한 경쟁력을 가진 분야”라며 “국내 기술 역시 R&D와 ODA를 거쳐 국제 조달 시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코이카 혁신기술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된 AI 진단 기술이 페루 등에서 적용된 사례가 있다. 다만 기술 발굴부터 글로벌 확산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는 이 모델이 보건을 넘어 기후변화 대응이나 기초 교육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봤다. “과거 한국이 벼 품종을 개량해 생산성을 높였듯, 혁신적인 기술을 현장에서 실증하면 중저소득 국가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인터뷰 말미,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연구와 기술이 인류의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은 구호가 아닙니다. 동시에 기업이나 연구자에게 봉사만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ODA는 문제 해결과 새로운 기회를 함께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확대된 ODA의 다음 과제는, 바로 그 지점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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