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이찬승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대표
“주위에서 좀 쉬라고 해요. 누구는 너무 소처럼 일한다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소띠예요. 어쩔 수가 없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계속 하고 싶어요(웃음).”
이찬승(67)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이하 교바사)’ 대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찬승’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면? 예상이 맞다. 능률 VOCA, 리딩튜터 시리즈 등 ‘영어’하면 떠오르는 대표 교재를 줄줄이 출간한 능률교육의 그 이찬승이다. 연 매출 400억원대의 ‘잘나가던’ 기업을 운영해오던 이 기업가는 2009년 30년간 운영해오던 회사를 매각하고 돌연 교육 시민단체의 수장이 됐다. 국내 공교육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뜻에서였다. 교육 시민단체의 대표가 된 지 7년째. 그는 “이제야 진정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았다”며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고 메모가 빼곡한 노트를 보여줬다. 지난 12일 서울 서교동 교바사 사무실에서 “한국 교육의 미래를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며 제2의 인생을 다짐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청년(靑年)’을 마주했다.
◇바깥세상이 궁금했던 시골 소년, 영어에 빠지다
영어와 인연을 맺게 된 처음을 묻자 이 대표는 “이제 영어 이야기를 하면 생소하다”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1949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노는 일”이었을 만큼 유난히 학구적이었다. 책밖에 모르던 시골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또 하나 있다면 바로 바깥세상이었다.
“참 힘들었던 시절이에요. 농사일을 거들고 학교 갔다 오면 소 먹이러 들로 나갔어요. 그러다 하늘에 비행기가 한 대 지나가면 먼 세계에 대한 동경을 느끼곤 했지요.”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배우게 된 영어는 시골 소년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영어 사전과 타임지를 들고 다니며 새벽 영어 학원을 다녔다. 녹록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농사를 짓느라 배움의 끈이 짧았던 형제들은 막둥이만큼은 양껏 배울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원했다. 하지만 ‘영어광’이었던 이 대표가 대학에서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가 아닌 수학이었다.
“어려서부터 위장이 약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체력 단련을 위해 유도부에 들어갔는데, 공부만 하다 보니 뭘 알 리가 있겠어. 운동하다가 코를 다쳤는데 축농증이 엄청나게 심하게 생긴 거예요. 농이 차면서 머리에 열이 막 오르니까 집중도 안 되고 암기가 전혀 안 되더라고요. 단순하게 ‘암기 안 하는 수학하자’고 결정을 했던 거죠(웃음).”
덜컥 수학교육학과에 입학했지만 흥미를 끌기에 영어만 한 것이 없었다. 전공 시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 영어 잡지를 들여다봤다. 졸업 후에 교직이 아닌 무역 회사를 택했다.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게 88년이에요. 제가 졸업할 당시는 우리나라가 수출이 팍팍 성장하던 시대였어요. 좋아하는 영어 써먹으면서 비행기 한 번 타보자 싶었어요. 그때 비행기 탈 수 있는 건 무역업밖에 없었어요(웃음).”
무역 회사에 들어가서 보니 외국 회사와 주고받는 영문 편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전도, 번역서도 없었던 것. ‘더 좋아질 수는 없을까’ 고민이 늘 따라다녔다. 그는 곧 무역업 종사자들을 위한 무역 영어 학습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간 모아온 영문 편지 사례들을 모으고, 빚을 내서 책 2000부를 찍었다. 전화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부동산중개소에 사정해서 전화선을 빌렸다. ‘영문 편지 250개를 드립니다.’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00부 완판. 무역 영어에 대한 수요를 확인한 후 본격적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책꽂이에 꽂혀 있으면 정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어디에서든 간편하게 볼 수 있으면서도 새로운 내용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도록 8절지 형태를 두 장으로 접은 일간지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삼성전자 수출부에 근무할 때였는데, 아무도 모르게 제가 다니던 부서는 물론이고 주변 빌딩에 싹 돌렸어요. 어떤 내용을 담으면 좋을지, 개선점은 없는지 확인하고 또 했죠.”
1978년 그렇게 한국 최초의 학습지인 ‘무역 영어 일간지’가 창간됐다. 학습지는 업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책상에 배달되는 학습지를 읽는 게 일상이 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이 대표는 학습지 사업을 계기로 1980년 능률교육의 전신인 ‘능률영어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영어 교육 출판에 뛰어들었다.
◇’어떻게 기여할까’ 생각하다 보니 400억 규모 회사로 승승장구
사업 경험이 없던 탓에 시행착오도 많았다. 당시 사채로 자금을 조달했는데, 한 달 이자만 3.5~4%일 정도로 살인적인 금리 시대였다. 학습지 창간 2년 후 얻은 빚은 당시 돈으로 5500만원이었다.
“당시 내 월급이 많아야 10만원이 됐을까. 지금으로 치면 15억원 이상의 빚을 졌던 것 같아요. 집 사람하고 아기 업고 이자 빌리러 다니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기도 해요. 그때 파산 직전에서 날 살린 게 바로 이 책이에요.”
이 대표가 서가에 꽂힌 책을 손으로 가르쳤다. 3권으로 된 ’60단계 이찬승 미국어 히어링(Hearing)’이다. 국내에 영어 듣기를 할 수 있던 것은 AFKN(주한미군방송)이 유일하던 때 이 대표는 유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던 부분인 ‘듣기’ 영역을 공략했다. 책은 불티나게 팔렸고 파산 위기에 허덕이던 이 대표는 일약 스타 강사가 됐다. 연달아 능률 VOCA까지 성공적으로 펴내며 3명으로 시작한 출판사는 탄탄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파산 위기에서 400억원대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대표는 ‘사람’과 ‘탁월함 추구’로 설명했다. “회사를 설립할 때 ‘생각은 새롭게, 개선은 무한히’를 사훈으로 걸었어요. 어제까지 최고였더라도 오늘은 더 훨씬 더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완성된 것을 쓰레기통에 버린 적도 있어요. 직원들의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존중을 바탕으로 직원들을 출판의 핵심 인재로 키웠다. 대개 출판사 외부의 저자가 만든 책을 출판하던 다른 출판사와는 달리 내부 연구원들이 저자로 참여한 것. 타사 직원들의 이름은 책 마지막 판권 페이지에 편집자로 기록되는 것에 그쳤지만, 능률교육의 연구원들은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마케팅과 영업 담당 인원이 많은 타사와 다르게 능률교육은 직원의 절반 이상이 연구원으로 구성됐다. 이 대표 자신이 쓴 책의 인세 전부를 회사에 무상 증여하고, 새로운 교재 개발과 개선에 사용했다.
“‘열 권의 평범한 책보다 한 권의 탁월한 책을 내자’ 그게 회사의 철학이고 전략이었어요. 떼돈을 벌기보다는 우리 책을 통해 국내 영어 교육의 질이 조금 더 좋아지기를 바랐죠. 사실 기업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그게 충실하면 돈은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이 대표의 뜻은 그대로 실현됐다. 그의 손을 거친 능률교육의 책들은 시장에서 ‘혼이 있다’는 평가를 얻으며 학습 서적 분야 선두에 올랐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앞다투어 능률 책을 참고해 책을 내기 시작했고, 업계 전체의 질이 향상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교육으로 돈 벌던 기업가, 교육에 돈 쓰는 교육운동가로 변신하다
‘이찬승 능률교육 대표, 경영권 매각’, ‘능률교육, 한국야쿠르트에 경영권 양도’. 2009년 언론사가 떠들썩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능률교육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 이 대표는 창립자로서, 경영자로서 애지중지 키워온 회사를 내려놨다. 그는 ‘미련이 없었다’며 딱 잘라 말했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젊은 세대가 기업 경영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업자가 바라는 것은 기업이 사회에 계속 기여하면서 잘 커가는 것이니까요. 그럼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했어요. 아이들이 떠오르더군요. 나는 책으로 이익을 봤지만 내 책으로 충분히 도움을 못 받은 아이들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내가 받은 것을 교육 생태계에 다시 돌려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능률교육을 경영하는 동안 해외의 굵직한 영어교육학회, 교육학회 등을 찾아다니며 흐름을 읽었다. 세계에서는 이미 학교, 교육의 지속 가능성은 어디에서 나올지,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능력은 무엇인지 등 미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논의가 전무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창의적인 문제 해결 능력, 협동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사회성 등인데 국내 교육은 여전히 지식 습득 위주 공부에 머물러 있었다. 이 대표의 다음 단계는 명확했다. ‘국내 공교육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 기회를 잃어버리거나 출발선이 불리했던 아이들도 모두 잠재력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사비를 털어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을 설립했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교바사의 활동은 학교 밖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세우고 지역아동센터에 초등영어 프로그램 ‘잉어빵’을 개발해 보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아이들의 수준과 환경에 맞게 길잡이 교사들이 맞춤형으로 영어를 가르친다. 영어 교육뿐 아니라 아이들의 일상 고민까지 듣는다. 이 대표는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진심으로 들어주는 경험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며 “이때부터 학습에 흥미와 호기심이 생긴다”고 했다. 교바사의 활동은 점차 확대됐다. 세계의 교육 트렌드나 선진 교육 문화 등을 국내에 소개하고 연구한 것. 그 중 하나가 뇌 기반 교육 연구다.
“처음 접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이 해외에서는 이미 보편화됐던 거예요. 아이들의 뇌가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는지 원리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흥미를 잃은 아이들이 수업에서 제외되죠. 단편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던 수업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한국 뇌기반교육연구소를 부설기관으로 설립해 뇌 친화적 교수학습법을 연구했다. 지금도 꾸준히 교사 연수를 진행한다. 사회성감성교육연구소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공감하거나 대응하는 능력 등 살아가면서 필요한 감정적 자질들을 연구한다. 이 대표는 “부모, 또래, 선생님 등 관계가 안 좋으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근심 걱정이 가득 찰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21세기교육연구소에서는 미래의 한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 교육 격차 완화 방안 등을 연구한다.
학교교육 변화의 역사와 미래 방향을 제시한 ‘학교교육 제4의 길’을 비롯해 뇌 과학, 교육 불평등, 교육정책 등 교육 분야와 관련한 세계의 흐름들을 번역해 책으로 출간하는 작업도 빼놓지 않는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만 10권이 넘는다. 대부분 1000권 미만으로 팔리며 적자를 보고 있지만, 이 대표는 출간 작업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몇 권이 팔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소수에게라도 도움이 될 만한 가치 있는 책이면 일단 내야죠.” 책 출간 작업을 비롯해 교바사 활동에 드는 비용 전액을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교육은 모두가 성장하는 것,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 변해야
최근 세계 교육 흐름은 무엇일까. 이 대표는 ‘지속 가능성’을 꼽았다. “국가, 가정, 학교, 환경 등 전 지구가 지속 가능성을 1순위로 둡니다. 교육은 이런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에요.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국가 경쟁력이 발목 잡힐 수밖에 없죠. 핵심은 교육을 통해 소외 계층도 잠재력을 발견하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세계 어디든지 교육의 첫 번째 철학이 ‘모든 아이는 배울 수 있다’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지 않는 것이 핵심이죠.”
하지만 이 대표는 “국내 학교 제도는 모든 아이가 배울 수 없는 환경”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다양한 아이를 하나의 교육과정, 하나의 수준, 똑같은 평가 방식으로 재단한다는 것. 이 대표는 “어떻게 공부 하나로만 아이들 줄을 세우느냐”며 “낙오자를 양산하는 지금의 사회가 야만적”이라고 했다.
그가 최근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교육 정의’다. “제도와 환경은 그대로 두고 아이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어요. 어른들의 인식, 정책이 바뀌고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매달 관련 전문가들을 모시고 교육 제도, 교육 방식, 평가 방식, 입학 전형 등에 내제된 불공정한 부분을 들춰내고 공유할 예정입니다.”
그는 덧붙여 “아이들이 출발선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민·관·학이 다 같이 손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쉬는 시간 없이 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느냐고 물었다.
“교육은 누구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게 바로 교육의 목표예요. 교육을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생각하는 순간 그 희생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가죠. 간판을 거창하게 달았으니 최소한의 기여는 하고 삶을 마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웃음).”
어둑해질 무렵, 인터뷰를 마치고 오는 길에 중학생쯤 된 소녀 두 명의 까르륵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던 이 대표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