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 살균기’로 물을, ‘에너지 허브’로 전기를…디자인이 바꾸는 삶

[현장] ‘서울디자인어워드 2025’ TOP10 대상 결정전
74개국서 941개 프로젝트…전 세계가 제안한 디자인 해법

‘페트병 뚜껑’처럼 생긴 살균기를 물병 위에 씌운다. 버튼을 누르면 3분간 자외선(UV) 빛이 작동해 물속의 대장균 등 세균의 99.9%를 제거한다. 필터나 화학물질이 필요 없고, 한 번 충전하면 수십 회 재사용할 수 있다.

세계 최초 병뚜껑형 UV 식수 살균기 ‘라디스 음용수 살균기’는 라오스 보케오 지역 농촌 마을에 보급된 지 3개월 만에 수인성 질환 발생률을 58% 낮췄다. 이후 우크라이나 병원, 우간다·동티모르·나이지리아 농촌 지역 등으로 보급을 확대하며, ‘누구나 안전한 물을 마실 권리’를 현실로 바꾸고 있다.

‘서울디자인어워드 2025’ 최우수상을 수상한 ‘라디스 음용수 UV 살균기’의 모습. /서울디자인재단

이 제품은 지난 2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서울디자인어워드 2025 TOP10 대상 결정전’에서 최우수상(Silver Prize)을 수상했다. ‘지속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을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는 환경·사회·경제적 지속성을 디자인으로 구현한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글로벌 어워드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서울디자인어워드는 ▲건강과 평화 ▲평등한 기회(유니버설 디자인) ▲에너지와 환경(업사이클·리사이클) ▲도시와 공동체 등 4개 부문에서 전 세계 74개국 941개 프로젝트가 출품돼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올해는 세계 최초로 ‘디자인 라이브 심사(Design Live Judging)’ 방식을 도입해 시민과 전문가가 현장에서 함께 대상을 결정했다. 심사위원단은 세계디자인기구(WDO) 회장이자 인도 디자인정책의 리더인 프라디윰나 브야스(Pradyumna Vyas)를 비롯해, 이탈리아 ADI 뮤지엄 관장 안드레아 칸첼라토, 지속가능 사회혁신 디자인 석학 에치오 만지니(Ezio Manzini), 베를린디자인위크 대표 알렉산드라 클라트(Alexandra Klatt), 디자인싱가포르 카운슬 대표 던 림(Dawn Lim) 등 13명으로 구성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상위 10개 프로젝트가 무대에 올랐다. 라오스의 ‘라디스 음용수 살균기’를 비롯해, 중국 최초로 사막 환경에 적용된 3D 콘크리트 프린팅 구조물 ‘사막의 방주’, 인도의 도축장 닭 깃털을 천연 모직섬유로 업사이클링한 ‘재생 깃털 섬유’, 여성 인권 억압의 상징인 히잡을 경기장 좌석으로 전환한 호주의 ‘해방의 좌석’ 등 다양한 프로젝트가 수상작에 이름을 올렸다.

◇ 나이지리아 ‘자자 에너지 허브’, 대회 대상 수상

올해 대상은 논픽션디자인(Nonfiction Design)의 ‘자자 에너지 허브(Jaza Energy Hub)’가 차지했다. 전력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나이지리아 농촌 마을의 에너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자자 에너지 허브의 현지 여성 운영자 ‘자자 스타’가 배터리를 들고 있는 모습. /서울디자인재단

허브는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생산하고, 이를 이용해 배터리를 충전한 뒤 주민에게 빌려주는 구조다. 주민들은 소액의 요금만 내고 배터리를 빌려 조명, 휴대폰, 선풍기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덕분에 전력 부족과 화석연료 의존이 줄고, 생활 환경이 크게 개선됐다.

설치 방식도 효율적이다. 평면 포장(플랫팩) 구조로 제작돼 트럭으로 운반 후 하루 만에 조립할 수 있다. 지역 재료를 활용하고 현지 인력을 고용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동시에 일자리를 창출했다. 내부 중앙에는 아이 돌봄과 학습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해 여성 근로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자자 에너지 허브’ 내부 구조도. /서울디자인재단

운영의 중심에는 ‘자자 스타(Jaza Stars)’라 불리는 여성 운영자들이 있다. 이들은 배터리 대여·회수, 회계, 고객 관리 등을 맡으며 경제적 자립과 사업 운영 능력을 함께 키워가고 있다. 현재 나이지리아 전역에서 약 1400개 허브가 운영 중이며, 4만5000여 명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발소, 상점 등 새로운 자영업이 생겨나는 등 지역 경제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프로젝트를 이끈 마디스 배글리(Mardis Bagley)는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전기를 공급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에너지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돕는 구조”라며 “지속가능한 변화는 기술이 아니라 협력과 공동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 “디자인은 공감의 언어…더 나은 세상을 향한 플랫폼”

심사위원장인 프라디윰나 브야스는 “각 프로젝트가 사회와 경제 전반에 미칠 파급력과 시스템적 변화를 중점적으로 평가했다”며 “디자인이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총평했다.

지난 24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된 ‘서울디자인어워드 2025 TOP10 대상 결정전’ 현장의 모습. /서울디자인재단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대표이사는 “서울디자인어워드는 단순한 디자인 경연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공감의 플랫폼”이라며 “전 세계의 지속가능한 디자인이 시민과 함께 호흡하며 미래의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서는 실현 전 단계의 아이디어와 프로토타입을 평가하는 ‘컨셉상’ 수상작도 발표됐다. 최우수상은 한국의 ‘나무껍질 바코드(Bark-Code)’와 영국의 ‘블루가든(Blue Garden)’이 차지했다. ‘나무껍질 바코드’는 나무를 3D 스캔해 소규모 산림 소유자가 탄소 배출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이고, ‘블루가든’은 해양 생태계를 복원하며 재생 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제시한 프로젝트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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