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테크, 농업의 미래를 짓다<1>
친환경 포장 기술로 농산물 가치 되살리는 ‘리필리’
“농업이 지속가능해지려면 포장재도 달라져야 합니다.”
김재원 리필리(Refeely) 대표의 말이다. 리필리는 비닐·플라스틱으로 포장되던 쌀, 콩, 밀가루 등 농산품을 자원순환이 가능한 종이팩으로 대체한 스타트업이다. 주로 식음료에만 쓰이던 종이팩을 생활용품과 화장품까지 확장하며, 농산물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리필리의 출발점은 김 대표가 탄소배출권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품은 의문에서 시작됐다. “플라스틱 대체재 중 종이팩만큼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것은 없는데, 왜 우유 같은 음료에만 쓰이는 걸까?”
실제로, 서울대학교 그린에코공학연구소에 따르면, 종이팩을 100% 재활용하면 연간 20년생 나무 130만 그루를 심는 효과와 함께 320억 원의 원료 절감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김 대표가 직접 세제와 샴푸를 담아 실험해 본 결과, 며칠 지나지 않아 종이팩은 터지고 내용물이 새어 나왔다. 일반 멸균팩은 방수 코팅, 빛과 공기 차단 등의 역할을 하는 펄프·플라스틱·알루미늄 세 가지 소재가 층층이 붙어 내용물을 보호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세제나 샴푸처럼 화학 성분이 강한 생활용품을 담기에는 취약했다.
◇ 5000번 실험 끝에 ‘무접착 초음파 종이팩’ 개발
리필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3중 구조를 유지하면서 소재 비율을 새로 조정했다. 그 결과, 화장품과 생활용품 등을 3년 이상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했다. 또한, 5000번이 넘는 실험 끝에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는 ‘초음파 접합 기술’도 자체 개발해 특허를 냈다. 김 대표는 “초음파 접합은 생산 속도를 20% 높이고 전력 사용량은 78% 절감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울 가산디지털산업단지 자체 공장을 세우고, 종이팩 생산부터 원료 충진, 포장, 배송까지 한 번에 처리하고 있다.
2023년 주방 세제를 담은 ‘리필리팩’이 첫 출시되자, 대기업들의 문의가 들어오고 협업이 시작됐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예요? 우리도 만들어봤는데 안 됐거든요.” 오뚜기의 친환경 브랜드 ‘오뛰르’ 주방세제, 유한킴벌리의 종이팩 핸드워시 등이 대표적 사례다. 특히 유한킴벌리 제품은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2024’ 패키지 부문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친환경 종이팩으로 한국 농산물 가치 강화할 것”
새로운 친환경 패키지에 대한 시장 검증이 더디게 진행되면서, 리필리는 장기적 공급망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체 브랜드를 만들기로 했다. 기업 간 거래(B2B)에 집중하던 전략에서 소비자 직접 판매(D2C)로 방향을 넓힌 것이다.
리필리는 2024년 12월, 친환경 곡물 브랜드 ‘로컬스톡(Local Stock)’을 선보였다. 충남과 해남 지역 농협에서 공급받은 백미·현미·찹쌀 등 다섯 가지 유기농 곡물을 750~850g 단위로 소분해 판매한다. 1인 가구의 보관 편의성까지 고려한 설계다. 김 대표는 “매일 먹는 밥이 건강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미세플라스틱 걱정이 없는 종이팩을 택했다”며 “보관이 쉽고, 농가와 소비자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출시 초기 소비자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마켓컬리 입점 후 8개월 만에 판매량이 1540% 성장했고, 최근 쿠팡 입점 후에도 주간 판매가 250%씩 늘고 있다. 리필리는 이러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식품 벤처육성 지원사업’ 대상 기업에 선정됐다. 현재까지 18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술 고도화와 제품 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리필리는 곡물뿐 아니라 고춧가루, 소금, 설탕 등 다양한 품목으로 제품군을 넓히고 있다. 올해 11월에는 자동화 설비를 도입한 ‘종이팩 2호기’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2호기는 1호기보다 크기를 줄이고 생산 효율을 15배 높였다. 스킨토너·샴푸 등 소용량 화장품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최근에는 농협중앙회, 한국농업기술진흥원, 소풍커넥트가 운영하는 농식품 특화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엔하베스트엑스(NHarvest X)’에도 선정됐다. 농협과의 PoC(개념 검증)를 통해 오프라인 유통 채널인 하나로마트 입점을 추진 중이다.
김 대표는 “농가의 좋은 특산물이 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에 갇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농협과 협력해 한국 쌀을 종이팩에 담아 수출하고, 친환경 패키지를 농업 수출의 경쟁력으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전했다.
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