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1000원씩 나머지는 교사가…선배 졸업하면 후배가 또 이어 나누는 법 배우고 입시에도 도움
지난 9일 졸업식, 학생들은 평생 못 잊을 선물을 받았다. 담임선생님이 전날 밤잠을 설치며 만들었다는 동영상이었다. 반장선거, 단합대회, 체육대회, 수능 D-50 파티, 수능 전날 격려 행사까지, ‘고3’으로 살아온 지난 한 해가 차례차례 화면 위로 흘러갔다. 그중에는 경기도 안양시 성문고 3학년 8반 학생들만 가진 특별한 추억도 있었다. 바로 페루에 있는 여자아이 루쓰(14)를 후원한 일이었다.
이규철(44·사진) 성문고 교사가 제자들과 함께 루쓰를 후원한 것은 이달로 만 2년째다. 반 아이들이 1000원을 내면 이 교사가 나머지를 채워 매달 페루로 보내고 있다.
“매년 제가 맡는 반 아이들이 같은 아이를 후원하는 거죠. 선배들이 졸업하고 나면 후배들이 이어서 후원하는 식으로요. 졸업한 선배들이 학교에 찾아오면 다 같이 루쓰 이야기로 꽃을 피워요. 선후배가 ‘나눔’이란 한 테마로 묶이는 거죠.”
이 교사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처음 후원을 시작한 건 재작년. 가수 션과 탤런트 정혜영 부부가 쓴 ‘오늘 더 사랑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좋은 일이니 반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어, 조심스럽게 후원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엔 매점 가서 과자 하나, 음료수 하나만 사도 1000원이니 큰돈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학생들이 제 호주머니를 털어 후원하는 거니까 망설여졌어요.”
이 교사의 걱정은 기우였다. 아이들은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그는 반 아이들과 상의해서 제3세계 국가에 사는 여자아이를 후원하기로 했다. 학생들 가운데 매달 돈을 걷을 ‘나눔 도우미’도 정했다. 그렇게 국제어린이양육기구 한국컴패션에서 돕는 페루 여자아이 루쓰를 만나게 됐다.
“나눔은 어떻게 첫 걸음을 떼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교사는 아이들이 그 첫 걸음을 잘 뗄 수 있도록 새 학년 첫날 나눔에 관한 수업을 한다. 루쓰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난 한 해 선배들이 루쓰와 주고받은 편지들도 펼쳐보인다. 마지막에는 후원 단체인 한국컴패션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신뢰를 심어준다.
“무조건 ‘나눔을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인 이야기만 하면 학생들이 하고 싶겠어요? 나눔을 하려면 일단 자신이 하는 후원이 뭔지 이해해야 해요. 이해하면 공감이 되고 돕고 싶어지죠.”
아이들이 내는 후원금은 곧 학부모로부터 받는 용돈인데, 학부모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에 학부모님께 8쪽짜리 ‘학급 경영 편지’란 걸 보내요. 거기에 나눔에 대한 이야길 꺼내죠. 제가 하는 나눔 교육이나 앞서 선배들이 경험한 나눔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 보냈더니 감사하게도 다들 동의해 주시더라고요.”
이 교사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작년에는 루쓰를 후원한 일을 입학사정관 활동내역서에 적어 제출한 학생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후원 사실이 적힌다는 소식을 학부모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어 넣기도 했다. 나눔으로 좋은 일도 하고 대입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학부모들도 좋아했다.
나눔을 하고부터 아이들에게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페루’하면 잉카 유적 ‘마추픽추’밖에 몰랐던 아이들이 루쓰와 영어로 편지를 몇 번 주고받는 사이에 페루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뭘 먹고 살고, 종교는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나라만 알고 살던 아이들이 세계와 세계인으로 시야를 넓힌 것이다.
나눔이 가진 순수한 재미도 알게 됐다. 학생들은 루쓰에게서 오는 편지나 카드를 특히 좋아했다. ‘성문고 3학년 8반 친구들에게’로 시작되는 루쓰의 편지가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후원자인 아이들과 후원아동인 루쓰 사이에 일종의 신뢰가 생겨났다. 이 교사는 “나눔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출발해야 오래간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교사는 나눔 교육의 효과가 학생들을 ‘소극적 기부자, 잠재적 기부자’로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에 한 경험은 평생 잊히지 않는 법이죠. 제가 최근에 동창회에 갔는데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 27년 전 일이 어제 일처럼 생각나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반 학생들도 나중에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서 다시 만났을 때 ‘야, 우리 페루의 걔 후원하지 않았어? 걔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라고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그러다 나눔을 시작할 수도 있고요. 나눔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은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나눔을 하게 되거든요.”
이 교사의 바람은 루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5년 후까지 반 학생들과 함께 후원을 이어가는 것이다. 후원이 끝나면 졸업생들과 함께 페루에 가서 루쓰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나눔의 처음, 중간, 끝을 함께 한 제자들에게 그들의 나눔이 일으킨 아름다운 기적을 보여주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