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경, 국내에 ‘스타트업’과 ‘액셀러레이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단어들이 생소했고, 창업 생태계에 대한 인식도 지금만큼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스타트업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등록된 액셀러레이터 숫자만 해도 400개를 넘는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기업을 창업하면 대출이나 신용보증을 통한 자금 마련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2025년 예산(추경 제외)을 보면, 중소기업 융자 관련 예산은 1조5000억 원, 사업화 및 기술개발 지원 예산은 1조7000억 원에 달한다. 이제는 창업 이후 사업이 잘되도록 돕는 예산이 더 많아진 것이다.
제로부터 시작한 창업 생태계는 아직 미진한 부분도 있지만,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획일적 사고에 갇힐 수 있기에,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하는지, 그 집중의 강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심이 더욱 필요하다.
◇ ‘문제 해결 기술’의 한계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기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환경오염에는 친환경 소재 개발로, 지구 온난화에는 탄소 저감·대체에너지·자원 재활용 등 기후테크(Climate Tech)로 대응해왔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확산에는 빠른 백신 개발과 치료 기술의 고도화로 맞섰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대부분 ‘객체 중심적 사고(Object-Centered Thinking)’에 기반해 있었다. 외부의 문제나 현상을 하나의 객체로 설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술이 활용된 것이다. 이 접근법은 즉각적인 반응과 실질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지만, 그 근본에 ‘사람’은 종종 빠져 있었다. 인간 중심의 고민이 빠진 기술은 문제 해결 이후의 삶에 어떤 의미와 변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AI가 사회 전반에 깊숙이 들어선 지금, 기술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문제 중심의 접근을 넘어서, 이제는 사람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 사람과 함께하는 기술, 사람을 위한 기술
기술은 단순히 문제를 제거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다. 그동안의 기술은 ‘무엇을 해결할 것인가’에 집중해왔다면, 앞으로는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 ‘어떤 삶을 만들고 싶은가’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주목할 사회 문제가 있다. 바로 지역 소멸, 고령 인구 증가, 저출산이다. 먼저, 지역 소멸은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사라지는 문제다. 지금처럼 문제 해결 중심 사고로 접근하면 ‘교통 인프라 확충’, ‘산업 유치’ 같은 해법이 나오지만, 그것이 사람의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정책도 기술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 ‘이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 문제는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고령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사회 전반이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술은 여전히 청년 중심, 생산 가능 인구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고령자의 삶의 방식, 욕구, 생활 패턴은 기술 기획 단계에서 배제되기 쉽다. 결국 노인을 위한 기술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편의 기능’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저출산 역시 단순히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현상이 아니라, 경제적 부담, 불확실한 미래, 양육 환경 등 종합적인 삶의 조건 속에서 비롯된 결과다. 기술은 단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보조 장치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자신 있게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기술은 결국 사람을 위한 구조로 설계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체 중심 사고의 본질이다.
◇ 인류의 삶을 향한 기술의 전환
기술은 강력하다. 그러나 그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에 따라 기술은 삶을 풍요롭게도, 소외되게도 만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기술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기술이 어떤 삶을 만들 것인가? 누구의 삶을 중심에 둘 것인가?
객체 중심 사고에서 주체 중심 사고로의 전환은 단순한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지금, 특히 지역 소멸과 고령화, 저출산 같은 구조적 위기 앞에서 기술은 더 이상 땜질식 문제 해결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람 중심의 기술, 삶 중심의 기술, 그리고 공존 중심의 기술이 절실하다.
이제는 기술 개발 초기 단계부터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문제 해결형 기술은 이제 ‘기본’이다. 그다음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기술을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진 기술은 아무리 정교해도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외로 다가올 수 있다. 기술은 결국 사람의 삶을 위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기술에서, 삶을 설계하는 기술로. 이제는 기술이 인간을 앞질러 가는 대신, 인간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인간 중심의 기술 개발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과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김영준 서울창조경제혁신센터 혁신사업실장
필자 소개 대기업 수석연구원, 교수, 사업가, 투자사 부문대표 등 다채로운 경력을 통해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지난 10년간 스타트업 스케일업 분야에 집중해 왔습니다. 20여 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3D프린팅 스타트업’, ‘하드웨어 스타트업’ 등의 저서를 통해 스타트업 성장 전략을 제시해 왔습니다. 아이디어 사업화 및 개방형 혁신 생태계 조성에 기여한 공로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2회 수상했으며, 한국자산관리공사 사장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