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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대부분의 조직은 사전에 성과 지표를 설정한다. 하지만 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현실은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상황이 변하고, 기획 단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요구가 생긴다.
이때 사업 담당자는 기존의 성과 지표보다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지표를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표 변경이 어려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사회적 요구보다 기존 지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임팩트 창출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도 일어난다.
조직이 사전에 설정한 지표를 유연하게 바꾸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자금 제공자나 관리 기관의 승인을 받은 성과 지표는 단순한 목표를 넘어 사실상 계약과 같다.
성과 지표와 연동된 예산을 변경하는 것은 계약서를 다시 쓰는 수준이라 많은 양의 서류 작업과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승인 절차가 오래 걸려 변화에 즉각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사업 담당자는 새로운 지표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변경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전에 설정된 성과 지표를 준수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업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들어온 바가 있는데, 갑자기 지표가 변경되어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일 것이다. 따라서 사업의 기본적인 지표는 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존 지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목표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변화하는 환경, 변하지 않는 성과 지표
비영리단체 ‘십시일방’은 보육원 등에서 자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들의 자립을 돕는 단체다. 십시일방은 매년 10여 명의 청년을 선발해 크게 주거 서비스와 자립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주거 서비스는 필수적이기 때문에 성과 지표가 고정적이다. 하지만 자립 지원 프로그램은 다르다. 청년들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지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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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시일방은 사업 시작 전부터 성과 지표를 촘촘히 설정했다. 지표를 달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연 단위로 구성됐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지표가 없으면 사업 승인과 예산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설정된 지표들은 ‘미래의 청년들에게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들의 상황은 달라졌다. 각자가 처한 현실이 변화했지만, 조직은 대응할 유연한 공간이 부족했다.
◇ 실제 현장에서는…“지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십시일방의 지원을 받던 한 자립준비청년은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됐다. 또 다른 배우 지망생 청년은 생애 첫 연극 무대 기회를 얻었고, 한 청년은 암 진단을 받아 치료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다른 만큼 필요한 지원들도 달라졌다. 이처럼 청년들이 처한 상황이 제각각 달랐지만, 십시일방이 사전에 설정한 성과 지표는 ‘교육 수료율 90%’였다. 모든 청년이 동일한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교육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필자는 이것이 사회가 십시일방에 기대한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회가 십시일방에 기대한 것은 자립준비청년들의 곁에서 그들의 삶이 최선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년들을 동일한 교육에 매번 참석하게 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개인화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십시일방은 별도로 모금을 진행해 임신한 청년에게 산후조리원 비용과 매월 육아 지원비를 지원했다. 첫 무대를 앞둔 청년에게는 배우용 프로필 촬영을 지원하고, 암 진단을 받은 청년에게는 고액 후원자를 연결해 매월 의료비를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설정했던 성과 지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교육 수료율 90%’를 충족하지 못했고, ‘교육 지식 테스트 결과’도 목표에 미달했다. 이에 대한 사유서와 보완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 ‘적응형 문제’엔 ‘적응형 사업’으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단순히 양적으로 전달하는 경우, 성과 지표를 촘촘히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취약계층 학생 100명에게 노트북을 제공하는 경우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고립·은둔청년, 이주배경청소년, 영케어러 등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하게 제품이나 서비스를 전달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들 곁에서 함께하고, 관찰하고, 개인화된 도움을 제공했을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들에게는 개인화된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지만, 기존 성과 지표 방식으로는 대응이 어렵다.
하버드대의 로널드 하이페츠 교수는 SSIR(Stanford Social Innovation Review)에 기고한 아티클 ‘Leading Boldly’에서 사회문제를 ▲기술적 문제(Technical problem)와 ▲적응형 문제(Adaptive problem)로 구분했다. 기술적 문제는 사회문제의 원인과 특성이 잘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해결책 또한 명확한 특성을 띤다. 반면 적응형 문제는 사회문제의 원인이 잘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해결책 또한 사전에 알기 어렵다. 이렇게 복잡하고 예측하기가 어려운 적응형 문제를 다룰 때는, 사전에 모든 계획을 세우기보다 유연한 계획과 지표를 설정하고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조정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사회문제의 속성이 복잡해지며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적응형 문제들은 스스로 그 모습을 변형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세세하게 정해두는 것은 오히려 사회문제 해결 가능성의 공간을 좁힌다. 이때는 ‘적응형 문제’라는 괴물에 맞설 수 있는 유연한 ‘적응형 사업’이 필요하며, 현장에 있는 사업 담당자의 개인적 판단에 따른 결정(Judgement call)을 믿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들이 어떠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 사업에 대한 임팩트를 측정하면 된다.
앞서 언급한 3명의 자립준비청년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무사히 출산을 한 자립준비청년은 산후조리원을 거쳐 육아에 전념하고 있다. 아직 아기가 2살이라 잠을 잘 안 자서 힘들다고 하지만, 이제는 짬을 내 십시일방의 교육에 참석하고 있다. 첫 연극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친 청년은 세계적인 극단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자립준비청년은 뒤늦게 대학교에 합격하여 올해로 대학교 2학년이 됐다.
필자는 십시일방이라는 작은 비영리단체의 대표다. 그래서 이러한 결정들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책임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관계자가 많은 큰 조직의 사업 담당자들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사전에 정해진 성과 지표를 달성할 수 없게 만들었던 청년들이 오늘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돌이켜본다. “선생님, 저 아무래도 이번주 교육에 못갈 것 같아요”라는 한 청년의 머뭇거림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까.
이호영 임팩트리서치랩 CRO·십시일방 대표
필자 소개 임팩트를 측정·평가하는 전문 기관인 (주)임팩트리서치랩에서 최고연구책임자(CRO·Chief Research Officer)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대학생들에게 지속가능경영과 소셜벤처 창업, 임팩트 측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 취약계층 청년들에게 무료 식권을 전달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밥’을 설립했고, 현재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무료 주거지를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십시일방’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사회혁신 생태계의 N잡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