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과 비영리 연구단체인 국제개발금융(DFI)이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각국 정부의 노력을 평가한 ‘2024 불평등해소실천(이하 CRI) 지표’를 발표했다.
CRI 지표는 불평등 해소를 위한 핵심 요인으로 꼽히는 3개 부문(공공서비스, 조세제도, 노동정책)에 대한 정책을 평가한 것으로 2년마다 발표된다. 한국은 노동정책은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으며 2022년 57위에서 올해 48위로 9계단 올랐다.
◇ 국가 90% ‘불평등 악화’시키는 정책 시행
올해 164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2024 CRI 지표에 따르면, 2022년 이후 대다수 국가에서 부정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조사 대상 5개국 중 4개국꼴로 교육, 보건, 사회보장 예산의 비중이 축소됐고 세제 및 노동권과 최저임금 부문은 역행했다. 조사 대상 10개국 중 9개국이 1개 이상의 부문에서 퇴행했는데 이는 추세를 되돌리기 긴급 정책이 없으면 90%의 국가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할 것을 시사한다.
CRI가 2017년 시범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3개 부문(공공서비스, 조세제도, 노동정책)이 모두 후퇴했다. 84%의 국가가 교육, 보건, 사회보장에 대한 투자를 삭감했고, 81%의 국가에서는 불평등을 줄이는 조세제도의 역할이 약화했으며, 90%의 국가에서는 노동권과 최저임금 상황이 악화했다.
또한 세계은행 및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을 지원받은 100개국 중 94개국이 지난 2년 동안 공공 교육, 보건 및 사회보장 분야에 대한 필수 예산을 삭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최빈국이 포함된 국제개발협회(IDA) 국가들의 경우 이 수치는 더 높아, 42개국 중 95%에 해당하는 40개국이 삭감을 추진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국가 중 41%가 법률적·실질적 노동권과 노조 조직화 측면에서 2022년도 지표 대비 퇴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심각한 후퇴는 아프가니스탄, 요르단, 짐바브웨,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협약 2개를 비준하며 노동정책 부문에서 가장 큰 개선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됐다. 해당 협약들은 2022년 4월 발효된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과 ‘제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이다.
이로 인해 2022년 161개국 중 57위던 한국의 노동정책 순위는 2024년 164개국 중 37위로 올랐다. 전체 불평등해소실천지표 순위는 2022년 24위에서 2024년 25위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공공서비스 순위(37위)와 세금 순위(8위)는 이전과 동일하다.
◇ 세계은행 노력 역부족…초부유층 과세 늘려야
경제학자, 주주, 시민사회의 압박이 거세지자 2023년 세계은행은 불평등이 심한 국가(지니계수 0.4 이상)의 수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전 지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초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 등 누진세를 지지하겠다는 세계은행의 이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세계 최빈국을 대상으로 보조금 또는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는 세계은행 IDA의 향후 재원 충당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에 불평등 해소는 지금까지 포함되지 않았으며, IDA의 자금을 받는 국가의 54%에서 불평등은 이미 높은 수준이거나 증가세를 보인다.
케이트 도널드 옥스팜 워싱턴 DC 사무소 책임자는 “최근 조사 결과는 세계은행과 IMF가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진정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평균적으로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들은 예산의 48%를 부채 상환을 위해 지출하고 있으며, 이는 교육과 보건을 합친 지출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최하위 10개국 중 6개국은 부채 위기에 처해 있거나 높은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새 정부가 공공보건 및 교육 예산을 각각 76%, 60% 삭감하고 부유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면서 순위가 급격히 하락했다. 파키스탄은 IMF가 권고한 긴축 조치에 따라 교육 및 사회보장 예산 비중을 3분의 1로 줄였다.
노르웨이와 캐나다 등 고소득 국가들조차도 여러 지표에서 뒷걸음을 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도 인구의 약 5%가 의료비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겪는다고 드러났다. 일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법인세율이 낮은 편이며 덴마크는 수년 동안 최상위 1%가 내는 소득세율을 지속적으로 인하해 왔다.
CRI 지표에서 최하위권에 속한 국가들은 여전히 대부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낮은 세수 외에도 부채 위기, 분쟁, 기후 붕괴로 인해 교육, 보건 및 사회 안전망에 투입되어야 할 제한된 자원이 다른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2022년도 이후 순위가 개선됐다. 부르키나파소와 바누아투는 최저임금을 인상했고, 크로아티아는 보건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으며, 가이아나는 여전히 40%라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법인세율을 유지하고 있다.
초부유층의 소득과 재산에 대한 세금을 높이면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들이 공공서비스 자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수조 달러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 7월에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주요 경제국들이 초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했으며, 아제이 방가 세계은행 총재는 이러한 결정을 환영했다.
매튜 마틴 국제개발금융(DFI) 사무총장은 “각국 정부는 불평등 해소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이는 극단주의를 심화시키고 성장을 저해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세계은행이 새로운 불평등 해소 목표를 채택함에 따라, 세계은행과 IMF는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을 선도할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며 “이는 무상의 공공서비스, 공정한 세제, 그리고 더 강력한 노동자 권리를 포함하는데 그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yevi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