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목)

[사회혁신발언대] 누구도 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나스타샤 샤포발 굿네이버스 우크라이나 긴급구호 자원활동가
아나스타샤 샤포발 굿네이버스 우크라이나 긴급구호 자원활동가

지난 2월 24일 아침, 음악 수업이 있어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Lviv)로 향하던 중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갑작스런 분쟁 발생으로 수업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2월 중순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분쟁 가능성은 주요 뉴스 중 하나였다. 당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설마 21세기에 무슨 전쟁이 일어날까’하며 단순 루머일 뿐이라 생각했다.

믿을 수 없게도, 현실로 마주한 분쟁의 현실은 참담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바로 전날까지도 나는 선생님을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분쟁 발생 직후 아이들에게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살고 있던 이즈마일(Izmail) 지역에서 20km 떨어진 군 시설이 폭격 되면서 가족들은 서둘러 짐을 쌌다. 20여 년의 추억이 담긴 고향을 떠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두려웠다. 평소엔 루마니아 국경까지 2시간 거리였지만, 밀려드는 피란민 행렬로 10시간 만에 루마니아에 도착했다.

낯선 땅 루마니아에서의 첫 달은 고비였다. 무작정 우크라이나를 벗어나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독일, 스위스 등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이 그리웠고, 매일 연주하던 피아노가 생각났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족, 친척과 함께 안전한 공간에 머무는 것뿐이었다.   

루마니아에서 지내며 한국에서 시작된 NGO(비영리기구) 굿네이버스의 지원을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자원활동가로 함께 할 기회를 얻게 됐다. 같은 어려움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선뜻 지원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인 루마니아 이삭체아(Isaccea)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심리사회적지원(PSS·Psychosocial Support)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국경을 막 넘어온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안전한 곳에 왔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는다. 폭격 피해가 컸던 곳에서 온 아이들은 더욱 큰 불안감을 표현하곤 했는데, 실제 분쟁의 현장을 목격한 한 아이의 경우 상황을 태연하게 묘사하며 오히려 무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굿네이버스에서는 자체 개발한 워크북을 활용해 아이들의 심리적 회복을 지원하고 있다. 그림 그리기, 찰흙으로 작품 만들기, 색칠 놀이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불안감과 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지난 3일에는 우크라이나 어린이날(6월1일)을 맞아 한국에서 온 굿네이버스 직원들과 함께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짓는 아이들의 모습에 그날만큼은 잠시 아픔을 잊고 모두가 기쁜 하루를 보냈다.

분쟁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사람이 우크라이나를 잊고 있지만, 여전히 그곳엔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에 남은 이들은 전기나 수도, 가스가 끊겨 눈과 빗물을 모아 버틴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는 아직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많아 전염병에 대한 우려도 크다고 들었다. 날마다 피란민들은 그동안 겪어보지 않은 최악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세상 누구도 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내가 난민이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현재 나와 가족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6월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 낯선 외지에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 나와 닮은 이들의 이름은 난민이다. 누구든지, 어디든지, 언제든지 모든 사람은 안전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전 세계 난민들에 대한 관심이 지속하길 바란다.

아나스타샤 샤포발 굿네이버스 우크라이나 긴급구호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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