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4일(수)

[월간 성수동] 농식품 꾸러미를 풀며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얼마 전 제주도에서 개최된 한 행사에서 수십 명의 참가자와 함께 농업과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농업만큼 인류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산업도 드물 것이다. 그 긴 역사만큼이나 경로의존성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점점 가속화되는 변화의 시대에서 농업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다. 농업의 미래에 대한 뜨거운 논의는 온실가스, 식량안보, 글로벌 밸류체인, 디지털과 청년 등의 다양한 주제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농업과 에너지 전문가가 함께하는 세션은 백미였다. 농업은 친환경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현대의 농업은 실제로는 탄소중립이라는 이슈에서 자유롭지 않다. 농업에서도 당장 2030년까지의 탄소 감축 목표량을 달성하기에도 벅차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리고 이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으로 이어졌다. 탄소배출이나 토양, 해양 오염원의 발생지로서 농업보다 기후 위기로 인한 생육환경 변화와 생산량 확보 등이 더 이슈가 되리라는 전망도 등장했다. 특히 농업에서 에너지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30~50%에 달한다. 따라서 면세유 등을 폐지할 경우 소비자들이 이 비용을 지출해야 하거나 농가 소득이 줄어들게 되기에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모두 함께했기에 가능한 토론이었다.

지난주에는 강원도 춘천에서 탄소중립 대응방안과 ESG전략을 논하는 지역발전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서 강원도는 2040년까지 넷 제로를 실현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강원도 내 기업들이 모두 RE100 인증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발표했다. 산림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는 강원도는 전국 지자체 중에서 탄소중립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강원도는 신규 석탄 발전소의 건립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지역과 기후위기, 탄소중립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관계, 그리고 글로벌 동향과 대응 전략까지 논의되었다. 학계, 재계, 정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전망을 내놓는 가운데에 복잡한 셈법이 오갔다. 기후 위기나 ESG 등의 확산세 속에서 각 지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힐 것이라는 것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대화와 토론의 자리에 참여하면서 이런 자리를 가진 것이 얼마 만의 일인지를 떠올렸다. 길었던 거리두기의 시대가 저물고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오프라인에서의 교감들이 이어지고 있다. 모임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는 기술과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다. 몇 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고, 또한 기술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연합의 분석에 의하면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덴마크 등 4차 산업혁명 경쟁력이 높은 국가들은 민·관·학이 함께하는 이노베이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국가 간 장벽을 넘어 민·관·학이 함께하는 이 불가능할 듯한 거대한 시스템은 단순히 논의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 자금 지원과 멘토링을 포함한 전반적인 혁신 생태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분석의 결론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만 들렸던 이노베이션 네트워크는 사실 멀리 있지 않았다. 농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제주도의 행사 뒤이어 진행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 단초를 발견했다. 강원도의 청년 농부는 특별히 관리하는 종자로 재배된 감자와 고구마를 보내주기로 했고, 충청도에서 논농사하는 어느 한 박사님은 쌀을, 제주도의 두 청년은 각각 유기농 감귤과 키위를 보내주겠노라는 약속이 이어졌다.

공약대로 속속 도착하는 농식품 꾸러미들을 이번 주 들어 받아보기 시작했다. 제주와 강원에서 논의했던 기술이나 탄소 중립에 대한 열띤 논의보다도 사실 생산과 현장을 아는 이들이 보내준 마음은 그 잔상이 더 오래 남았다. 어쩌면 지구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조금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누려야 하는 이 시대에 진실로 필요한 답은 그 꾸러미들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감염병으로 2년간 마음이 얼어붙었었기 때문일까, 어느 때보다 더 유난히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한상엽 소풍벤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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