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아무튼 로컬] 로컬의 ‘부캐’ 전쟁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새해가 되면 전국의 지방 도시들은 ‘부캐 전쟁’에 돌입한다. 전쟁의 진원지는 중앙정부다. 정부 각 부처가 그 나름의 콘셉트를 앞세워 다양한 공모 사업을 내놓으면 지방 도시들은 그 사업을 따내기 위해 사활을 건다. 국토부가 스마트시티를 선정하겠다고 하자 갑자기 전국 여러 도시가 ‘우리가 바로 스마트시티 적임’이라고 나선다. 문체부가 문화 도시, 관광 도시를 지정하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일제히 문화 도시 혹은 관광 도시 흉내를 낸다. 모두들 본캐는 뒷전이고 주관 부처 입맛에 맞는 부캐를 앞세워 간택받으려 안달이다. (부캐는 ‘부캐릭터’를 줄인 말로, 본래 모습인 ‘본캐’의 대립어다.)

지자체가 부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중앙정부의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지방에서 걷히는 세금 가운데 80%가 국고로 들어가고 지방에 남는 세금은 20%에 불과하다. 그 돈으로 빚 안 지고 살림을 꾸릴 수 있는, 즉 재정 자립도가 100%를 넘는 지자체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강원도 몇몇 군 단위 지자체는 재정 자립도가 너무 낮아 공무원들 월급 주고 나면 곳간이 바닥을 보인다. 그러니 정부 지원금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지역 창업자들도 부캐 전쟁을 벌이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나 지원 기관의 보조금을 받기 위해 어떨 땐 ‘소셜벤처’가 되고 어떨 땐 ‘사회적기업’이 되고 또 어떨 땐 ‘로컬 크리에이터’의 얼굴로 나타난다. 회전의자를 뱅글뱅글 돌리듯이 공모 사업에 맞춰 자신의 부캐를 내세운다.

그런데 이런 억지춘향식 부캐 만들기를 개탄하는 시각도 관점을 바꾸면 긍정적인 쪽으로 바뀔 수 있다. 트로트 가수 ‘유산슬’, 프로듀서 ‘지미유’ 등 11가지 부캐로 정상급 예능인의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유재석씨와 같이 부캐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새로운 자산이 되는 세상이다. 자신 안의 다양한 부캐 중에서 상황에 맞는 것을 골라 쓰는 게 ‘힙하다’고 여겨지는 시대다.

부캐라는 ‘또 다른 자아(alt-ego)’를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이 개인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철학적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미국의 코칭 전문가 토드 허먼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자신의 저서 ‘알트 에고 이펙트’에서 “대체 자아는 가면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당신 안에 있는 영웅을 깨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자기를 경험하고, 가능성을 실험하고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라고 귀띔한다. 비욘세, 데이비드 보위, 오프라 윈프리 등은 자기만의 부캐 만들기를 통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BTS)은 ‘MAP OF THE SOUL’ 연작의 첫 작품인 ‘PERSONA’ 앨범의 첫 곡에서 “나란 놈을 고작 말 몇 개로 답할 수 있었다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겠지”라며 자신 속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사랑하라고 노래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로컬의 창업가들은 여러 부캐를 사업 자산으로 능숙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칸막이로 분리된 수직적 사회 구조에 소속되어 자아를 최대한 숨기고 집단적 페르소나에 맞춰 살아야 했던 산업화 세대와는 달리, 로컬 창업가들은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창의적 비즈니스로 건강하게 풀어낸다. 책방에서 술을 파는 ‘북맥 서점’을 운영하고,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에게 요가-명상 프로그램을 함께 판매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편하고 자연스럽다. 기성세대 눈에는 혼란과 자아분열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이 MZ세대 로컬 창업자에게는 도전과 성취 대상이다.

그렇다면 지방 도시들도 거기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중앙정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지역에 잠재해 있는 매력과 자원을 끌어내 보여주는 멀티 부캐 도시가 되는 것이다. 외부 기획사 용역으로 만든 일회용 부캐가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찾고 키워내는 부캐가 많아질 수 있도록 장려하고 칭송하고 지원해줘야 한다.

2500년 전 어느 날 공자에게 ‘섭’ 지방의 제후가 찾아와 어떻게 하면 경제를 살릴 수 있겠냐고 컨설팅을 부탁했다. 공자는 “근자열원자래(近者說遠者來)” 즉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즐거우면 먼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백성들이 즐기며 키워 낸 다양한 부캐들이 관광산업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한종호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