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화)

‘느슨한 모임’이 세상을 바꾼다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들은 고민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일단’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출발했다. 사회문제 하나씩 붙들고 할 일을 찾아 나선 모임들은 불과 2~3년 만에 결실을 내기 시작했다. 이 느슨한 모임은 번듯한 조직을 갖춘 시민단체나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사회적기업 ‘인스팅터스’가 대표적이다. 인스팅터스는 콘돔과 월경컵 등을 유기농 혹은 식물성 비건으로 제작하는 회사다. 지난해에는 매출 50억원을 올렸다. 지금은 10명 넘는 직원이 일하는 번듯한 회사가 됐지만, 인스팅터스의 시작은 20대 초반의 또래 3명이 만든 작은 모임이었다. 박진아 공동대표는 “콘돔은 건강한 성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인데, 왜 언급 자체를 터부시할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했다”면서 “이후 콘돔을 구하기 어려운 청소년, 발암 물질이 나오는 기성 콘돔 등의 문제로 옮겨갔고, ‘친환경 콘돔을 직접 만들어 팔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창업 6년 차가 된 올해는 퀴어 퍼레이드, 디지털 성범죄 방지 연구, 코로나19 의료진 등에게 돈과 물품을 기부할 정도가 됐다. 박진아 공동대표는 “사업 모델이 기존 공익 활동과 다르다는 점에서 번번이 지원 사업에서 떨어졌다”면서 “그렇게 2년이나 버텨야 했는데 마침 청년 모임에 모임비나 사업화 자금을 지원해주는 서울시 청년허브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박 대표는 최근 청년들의 공익활동 트렌드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빈틈 메우기’라고 했다. “각자가 관심 있는 사회 문제를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본다는 게 요즘 청년들 방식이에요. 시민단체나 창업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기존 방식에 속하기 어려운 청년들의 활동을 지원해야 새로운 사회문제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요? 저희도 처음엔 콘돔 사업이 공익적인 일이라고 봐주는 사람이 적었거든요.”

느슨한 모임에서 탄탄한 시민단체로 성장한 ‘핫핑크돌핀스’도 비슷한 케이스다. 지난 2011년 세워진 핫핑크돌핀스는 돌고래 보호 분야에 특화된 유일무이한 단체다. 이들의 시작 역시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청년들 모임이었다. 황현진 대표가 돌고래 쇼의 폐해나 한국 돌고래 현황을 살펴보는 모임을 만들었고, 여기 참여한 사람들이 창립 멤버가 됐다.

기본소득을 연구하는 비상근 청년 활동가들의 모임인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도 마찬가지다. 백희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운영위원은 “기본소득을 사회적 주요 의제로 다루길 원하는 청년들과 함께 시급하게 제도를 바꾸는 ‘성과’에 집착하기보단 추구하는 가치에 맞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했다. 지난 2012년 만들어진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비상근 활동가들이 모임을 이어가며 기본소득 분야 청년 활동을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서울시 청년허브는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의 청년 모임에 참여한 단체나 사람들 70% 이상이 각자의 방식으로 공익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로웨이스트 카페인 ‘보틀팩토리’, 탈북민 지원 단체 ‘온도시’, 일하는 여성 청년 대상 모임 서비스를 제공하는 ‘빌라선샤인’ 등도 이들 모임을 거쳐 갔다. 안연정 서울시 청년허브 센터장은 “청년 모임을 지원하는 건 청년들에게 자신의 관심사를 탐구할 시간, 공간, 네트워크를 준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안 센터장은 “지난 8년간 청년 모임을 지원하는 사업인 ‘청년참’ ‘청년활’ ‘n개의 공론장’ 등을 거쳐 간 기업이나 단체가 수백 곳”이라며 “지원금 규모로 보면 보잘 것 없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간다”고 했다. 이처럼 청년 모임을 지원하는 기관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분야 ‘원로 단체’ 격인 하자센터 외에도 서울시 청년허브,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카카오100up, 무중력지대 등이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 혁신가나 새로운 사회 문제 해결법 발굴을 위해 이런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원재 랩(LAB) 2050 대표는 “영리·비영리를 막론하고 뛰어난 혁신가는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도전하는 시간을 거쳤다”면서 “청년 모임 지원은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청년들에게 이런 시간과 공간을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런 지원이 늘어나면 영리·비영리·취미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 뛰어드는 청년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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