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탈북민, ‘먼저 온 통일’이라 여겨주길… 北에서의 경험 잘 써먹어주세요”

 [우리사회 利주민]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위원

지난해 국내 거주 이주민은 261만명이다. 전라북도 전체 인구(181만8157명)를 훌쩍 넘는 규모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는 말도 낡아버린 지 오래다. 이주민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어도 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며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사회 利주민’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주민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다. 첫 주자로 탈북민 조충희(57·사진) 굿파머스 연구위원을 만났다.

조충희 굿파머스 연구위원.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저 같은 사람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써먹으면 좋겠어요.”

조충희 위원은 지난 2011년 탈북해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10년간 수의사 겸 축산 전문 공무원으로 일했다. 북한 사정에 밝은 그는 현재 농축산 전문 국제개발협력 NGO 굿파머스와 함께 아시아 개발도상국 농가를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국내에 북한 축산 전문가는 여럿 있지만, 북한 출신은 그가 유일하다. 지난해 발생한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나 최근 코로나19 사태에도 북한 상황을 가늠하려는 여러 언론이 그를 찾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5년 넘게 몸 쓰는 일로 먹고살아 내 전문성을 펼칠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사람들이 찾는 한 가진 지식을 모두 쏟을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北에서 출신 성분 탓에 온갖 수난… 가족 위해 한국행 결심

조충희 위원은 한국 땅을 밟기까지 북에서 지난한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는 “고생은 끝도 없었지만 돌아보니 고마운 사람이 참 많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지금에야 웃으며 말하지만, 둘로 나뉜 한반도 양쪽에서 그의 삶은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북한에선 출신 성분이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는 월북 재일교포였다. 당원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고,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입학도 가능한 성적이었는데, 대학 입학은커녕 취업도 안 됐어요. 그때 당 간부가 건설 현장에 투입되는 노동부대인 ‘돌격대’에 3년만 다녀오면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투입되고 나니 약속이 달라졌어요. 그곳에서 10년을 보내야 했지요.”

탄광이나 아파트 등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갖은 고생을 한 그는 겨우 평성수의축산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수의대를 졸업하고 어렵사리 공무원이 됐는데, 이번엔 승진길이 막혀 있어요. 그때 두 아들 미래도 뻔하단 걸 깨닫고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북한 수의사 면허는 아무 쓸모 없는 휴지 조각이었어요. 의사나 약사는 국내 면허 시험에 바로 응시할 수 있는데, 수의사는 안 된다더군요.” 생계가 막막했던 그는 공장, 식당 주방, 편의점 등을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몸은 지쳐갔지만 축산 전문가로서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지난 2014년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진학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고, ‘북한 축산과 경제’를 주제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그의 굴곡진 삶은 이듬해 굿파머스가 개최한 농업 논문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반전을 맞는다. 조 위원의 논문을 눈여겨본 굿파머스가 개도국 지원 프로젝트에 함께할 것을 요청했다. ‘조씨’로 불리던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다.

축산 전문가로 개도국 지원… 남북 협력에도 보탬 되고 싶어

요즘 조 위원은 ‘배운 것 남 주는 재미’에 푹 빠졌다. 동남아시아 개도국 축산 농가를 돕는 일이다. 그는 “아시아 개도국들은 값싼 가축인 닭을 키우는 가정이 많고 기술과 자원이 부족하단 점에서 북한 상황과 무척 비슷하다”며 “극한 상황에서 축산 생산량을 늘리는 건 북한에서 늘 하던 일이니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했다.

출장만 가면 조 연구위원은 현장을 훨훨 날아다닌다. “한국 전문가들은 대단한 기술이 있어야 축산 효율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데, 개도국 가난한 마을에선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 큰 효과를 내기도 해요. 예를 들어 닭 품종을 개량하려면 현지 닭 10마리당 튼튼한 한국 토종 수탉 1마리씩을 넣어 주는 식이죠. 사료에 쌀겨나 맥아박을 섞는 것도 좋죠. 또 닭은 습한 데 있으면 병에 쉽게 걸리는데 바닥에 아침 이슬이 잘 맺히는 동남아시아 날씨 특성을 감안해 축사를 바닥에서 조금만 올려줘도 폐사율이 확 낮아집니다.” 조 위원 입에서 비법이 술술 나왔다.

개발협력 NGO들의 은근한 골칫거리인 현지 공무원들과의 ‘밀고 당기기’도 단숨에 해결한다. 그는 “라오스나 캄보디아처럼 사회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나라에선 공무원과 일할 때 원칙이나 계약서 내용을 근거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그럴 땐 선물을 주며 환심을 사거나, 윗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는 걸 흘리면 바로 풀린다”고 말했다. 조언을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부터 정식 연구위원으로 굿파머스에 합류해 상근 직원으로 일하게 됐다.

조충희 위원은 북한에서 쌓은 경험과 축산 전문성을 살려 축산을 매개로 한 남북 협력을 계획하고 있다.

“북한은 축산 생산량 증대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남북 대화’를 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하겠지만 제3국에서 캄보디아, 라오스 등 개발도상국과 한국이 축산 관리를 주제로 함께 모인다면 북한 전문가도 참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 제가 북한과 한국, 아시아 개도국에서 쌓은 경험이 남북 협력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되도록 애쓸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새 삶을 얻었으니, 제가 가진 지식으로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죠.”

그는 “북한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국 사회에 기여할 의지가 있는 탈북민이 많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들을 ‘잘 써먹어달라’는 것이다. “탈북 이주민들이 북한에 대한 지식과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우리 사회가 조금만 힘을 보태준다면 장기적으로 남북 협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북한 내부 상황을 속속들이 아는 탈북민들과 한국 전문가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남북 협력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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