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더 많은 사람 살리기 위해… 수술장 박차고 나와 아프리카 주민들 속으로

[Cover Story] ‘이태석봉사상’ 수상… 박세업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본부장

소외된 사람 위해 선택한 ‘외과의사’
1998년부터 해외 각지서 의료봉사
15년 전 온 가족 함께 아프간으로
밤낮 사람 살리는 수술에 몰두해

외과의사에서 보건전문가로
가난·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 보며
근본적 해결책 찾고자 보건학 공부
도시 빈민촌 돌며 결핵 예방 주력
지역 문제 해결할 ‘청년’ 육성에 집중

올해 ‘이태석봉사상’을 받은 박세업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본부장은 ‘외과의사’이자 ‘국제보건전문가’로 15년 넘게 저개발국 현장을 누비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현재는 아프리카 최북단 모로코에 살면서 도시 빈민층 결핵 예방에 힘쓰고 있다. 시상식 참석차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이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1962년 태어난 동갑내기 두 남자가 있다. 동네는 달랐지만 둘 다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변에 항상 가난이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꿈을 키웠다. 1981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민주화 운동이 뜨겁던 시절.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열망 속에서 둘은 비슷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한 사람은 의대를 졸업한 뒤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대에 입학한다. 다른 한 사람은 외과 전문의가 돼 개인병원을 연다. 세월이 흘러 신부가 된 남자는 아프리카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로 향한다. 외과 의사가 된 남자는 개인병원을 접고 전쟁이 한창인 중동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다. 다른 길을 가는 듯했지만 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다. 가장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와 올해 ‘이태석봉사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세업(58)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본부장.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두 사람의 인생은 신기할 만큼 궤적이 닮았다. 이태석 신부의 선종 10주기를 나흘 앞둔 지난 10일, 서울역 공항철도 타는 곳 앞에서 박세업 본부장을 만났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여행용 캐리어 3개를 굴리며 나타난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전쟁터로 간 외과 의사

―어제(9일)가 이태석봉사상 시상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부산시청에서 상 받고 오늘 서울로 왔습니다. ‘울지마 톤즈 2’가 개봉했다고 해서 영화도 봤어요. 이태석 신부님이 윤시내의 ‘열애’를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 또래에게 인기가 많았던 노래였거든요. 봉사의 삶을 살다 떠난 위대한 성직자이기 이전에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료’라는 느낌이 들어 뭉클했습니다.”

―한국에는 언제 왔습니까?

“보름 정도 됐어요. 허리 시술도 받고 하느라 바빴습니다. 9년째 모로코에서 지내고 있는데 일할 때 무거운 걸 많이 들고 다녀서 그런지 허리가 나빠졌어요.”

―의사인데 무거운 걸 들 일이 많나요?

“모로코에서 하는 주 업무가 ‘결핵 예방’이에요. 매년 2만7000명의 새로운 결핵 환자가 모로코에서 발생하고 있어요. 자기가 결핵 환자인지도 모르고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염시키죠. 특히 도시 빈민촌에 결핵 환자가 집중돼 있어요. 이런 지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결핵 환자를 발굴하는 일을 합니다. 가래를 받아가서 검사하고 결핵 판정이 나오면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줘요. 환자들 집에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갈 수 없으니 밀가루나 치즈, 기름 등 음식이나 생필품을 들고 가는데 이게 생각보다 꽤 무겁습니다.”

―하루에 몇 집이나 다닙니까?

“보통 5가정에서 10가정까지 방문하고 있어요. 마을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도로 상태가 아주 나빠요. 덜컹대는 차 안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허리에 계속 무리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현장에서 오래 일하려면 건강해야 하는데 관리를 잘 해야죠(웃음).”

―전공을 외과로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다닐 무렵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 뜻에 따라 의대를 갔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에 대한 얘길 들었어요. ‘나도 선교사가 돼서 의료 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런 일을 하기엔 외과 의사가 좋다고 들었어요. 병원비가 없는 사람들에게 무료 수술을 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개인병원을 차린 1998년 베트남을 시작으로 중국, 몽골, 아제르바이잔 등 의료 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매년 1~2차례 방문해 의료 봉사를 했다. 그는 “첫 해외 의료 봉사를 갔던 베트남에서 만난 모녀가 잊히질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술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구순열(선천적으로 윗입술이 갈라진 것)인 딸아이를 안고 사흘 동안 병원 문 앞에서 기다린 엄마가 있었어요. 예약이 안 된 환자였지만 어렵게 시간을 쪼개 수술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아이의 엄마를 보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2005년 온 가족을 이끌고 전쟁이 한창이던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습니다. 계기가 있었나요?

“아프가니스탄에 의사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끌리듯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참했어요. 폭탄 터지는 소리, 자살 테러 소식이 끊이질 않았어요. 수도 카불에 있는 큐어국제NGO병원에서 근무했는데 큰 외상을 입은 환자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어요.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밤낮으로 수술했어요.”

―지금에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많이 위험하고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어려운 점이 많았죠. 점심은 거의 못 먹었던 것 같아요. 현지인들이 밥 먹을 돈이 없어서 거의 밥을 안 먹으니까요. 같이 다니면서 같이 굶었어요(웃음). 전기도 일주일에 딱 6시간만 들어왔어요. 격일로 2시간씩. 불편했죠. 그래도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좋았던 기억이 훨씬 많아요.”

―어떤 게 그렇게 좋았나요?

“초반에는 언어도 잘 안 통하고 문화도 낯설어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봉사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조금씩 문화를 익히고 페르시아어도 배우고 친구들을 사귀면서 해외 봉사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보람을 느끼게 됐어요. 그들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됐고,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게 됐죠.”

―아프가니스탄에는 언제까지 있었나요?

“2007년 8월 아프가니스탄이 여행 금지 국가가 되면서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야 했어요. 너무 아쉬웠는데 그해 11월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바그람 미군기지 내에 코이카 한국병원이 생기면서 병원장을 맡게 됐거든요. 기지 앞으로 매일같이 환자가 몰려들었는데, 기다리다 진료를 못 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 의사·간호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어요. 현지 의료인이 주민들을 직접 치료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2009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박세업 글로벌케어 북아프리카본부장은 “현장 전문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같이 웃는 사람

―지금 모로코에서 하는 일은 외과 의사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술에 몰두했어요. 길게는 열두 시간씩 수술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런데 종일 수술해서 한 사람 살려놓는 동안 밖에서는 수백 명이 죽어가는 겁니다. 가난해서, 못 먹어서, 약이 없어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군병원 의사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당신이 하려는 게 바로 ‘보건’이야.”

―그래서 ‘수술’을 관두고 ‘보건’에 뛰어든 건가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병원이 아니라 ‘현장’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렬해졌어요. 저개발국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근본적인 방법을 찾고 싶어서 50세라는 늦은 나이에 보건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2011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국제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받자마자 현장에 투입됐다. 한국의 의료전문 NGO인 ‘글로벌케어’의 북아프리카본부장을 맡아 아프리카 최북단 모로코로 갔다. 그는 “병원에 앉아서 병을 진단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 들어가 병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가난한 나라일수록 결핵·당뇨병·고혈압 같은 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러 질병 중에서도 결핵에 주력하는 이유가 있나요?

“결핵은 전염병입니다. 메르스나 에볼라와 비슷하죠. 모로코에서만 매년 3000명이 결핵으로 죽어요. 국제사회에서도 결핵은 중요한 이슈입니다. 나라 간 이동이 쉬워지면서 모로코 결핵균이 미국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죠. WHO(세계보건기구)는 결핵을 퇴치하기 위한 전략으로 ‘직접 복약 확인’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했어요. 결핵 환자가 간호사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고 제대로 삼켰는지 확인받도록 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로코 같은 나라에서는 이게 잘 안 됩니다. 간호사를 만나려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죠. 결핵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난해지고 마약에 손을 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어요.”

―한국의 ‘모바일 헬스’ 기술을 접목해 성과를 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과 함께 ‘스마트 약상자’라는 걸 만들었어요. 약을 먹어야 할 시각에 맞춰 환자에게 ‘알람’을 울려주는 거죠. 의료진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환자가 약 먹을 시간에 상자의 뚜껑을 열었는지 모니터링할 수 있어요. 상자에 담긴 약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도 확인할 수 있죠. 글로벌 케어에서 관리하는 환자들에게 스마트 약상자를 지급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모로코 보건소에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보건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네요.

“결핵 퇴치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더 집중하는 건 ‘청년’입니다. 현지 청년들을 고용해 결핵 환자 집을 방문하는 일을 함께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월급을 주니까 그냥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NGO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컴퓨터 쓰는 법도 가르쳐줬어요. 수년간 이렇게 차근차근 배운 친구들이 지금은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결국 사람을 키워야 해요. 지역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청년이 더 많아져야죠.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만이 보건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보건입니다.”

그는 한국어, 영어, 페르시아어, 불어, 모로코어, 아랍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한다. 왜 그렇게 열심히 언어를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웃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외과 의사로, 그리고 국제보건전문가로 15년 넘게 일했지만 앞으로 20년 더 저개발국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로코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아요. 상 받으러 한국 올 때도 직원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캐리어를 힘차게 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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