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금)

[공변이 사는 法] ‘로힝야 학살 보고서’ 만드는 김기남 변호사…”훗날 국제재판 자료로 쓰이길”

[공변이 사는 法] 김기남 변호사


지난 14일 서울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사무실에서 만난 김기남 변호사. 그는 “로힝야는 세계에서 가장 차별받고 민족이라며, 이번 로힝야 학살 보고서 작업을 통해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로힝야 학살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2년이 됐습니다. 문제 해결은커녕 난민을 향한 또 다른 갈등만 생겼죠. 더 늦기 전에 학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피해 생존자 320명 정도 만났어요. 1년에 네 번 정도 방글라데시 난민캠프를 오가면서 증언과 자료를 모았죠. 생존자 증언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합니다. 가끔 그분들 말씀이 머릿속을 스칠 때면 굉장히 고통스러워요.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에요.”

김기남(42) 변호사는 ‘로힝야 학살 기록사업’의 선봉에 있다. 지난 2017년 미얀마 정부군에 의한 로힝야 학살 사건 이후 9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UN은 사망자만 1000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김 변호사는 지난 3년간 국제분쟁 전문 비영리단체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이하 아디) 소속으로 활동하며 피해 생존자 증언과 자료를 모아 마을 단위의 학살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 로힝야 사건에 대해 마을별로 기록사업을 벌이는 건 세계적으로도 처음 이뤄지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8개 마을에 대한 학살 보고서를 완성했고, 올해 20개 마을을 목표로 추가 작업을 진행 중이다.

‘2017년 8월’ 로힝야 비극의 시작…”증거 소멸 전에 기록으로 남겨야”

김기남 변호사에 따르면, 2017년 8월말 로힝야 집단학살은 마치 군사작전 펼치듯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로힝야 집단 거주마을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25일. 시작은 인딘과 쿠텐콱 마을이었다. 군인을 태운 트럭이 마을에 몰려왔고,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다음 날인 26일에는 돈팩, 27일에는 춧핀에 총알이 쏟아졌다. 사흘 뒤 뚤라똘리에서는 단 하루 만에 약 400명의 주민이 학살됐다. 김 변호사는 “당시 마을에는 인근 지역에서 피신 온 사람을 포함해 1500~2000명 정도가 머물렀다고 하는데, 다른 마을 주민들은 사망자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기록사업을 계획하진 않았어요. 2017년 10월 방문한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우연히 뚤라똘리 주민을 만나 이야기 나눴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최대 피해 마을에서 살아남은 분이셨죠. 그분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자료를 수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증거가 소멸하기 전에요. 훗날 국제 전범재판에서 로힝야 사건을 다룰 때 중요한 자료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휴대전화 하나를 꺼내 보였다. 투명한 지퍼백 안에 담긴 낡은 휴대전화. 그는 “마을 폭격 장면을 영상으로 고스란히 담은 증거 자료”라고 말했다.

아디가 입수한 영상 속에는 아이를 안고 내달리는 남성이 모습이 담겨 있다. 달리는 남성의 왼편으로 아슬아슬하게 포탄이 떨어졌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주민들 뒤로 가옥이 불타고 있다. 2017년 8월 25일 아침, 로힝야 대표 거주지 중 하나인 인딘 마을의 모습이다.

“포탄이 마을 곳곳에 떨어지는 긴박한 순간을 촬영한 분이 있었어요. 모두가 살기 위해 도망치는 그 난리통에 말이에요. 자료를 건넨 분이 유일하게 바라는 건 ‘국제 사회가 정의를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로힝야 학살 보고서 2020년 완성 예정…’팩트파인딩뮤지엄’ 통해 공개할 것

로힝야 학살 생존자를 인터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언어는 통역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지만, 문화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인터뷰 질문 자체가 달라야 했어요. 우선 로힝야들에게는 날짜와 시간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총격이 몇시에 시작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무슬림은 매일 다섯 번씩 기도를 하니까, 몇 번째 기도와 가장 가까웠는지를 물어봐야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시간 개념이 없는 게 로힝야만의 특징은 아니에요. 오랫동안 단절된 생활을 했고 교육의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죠.”

현재 아디의 로힝야 학살 기록사업은 현지 로힝야 활동가 6명의 도움으로 진행된다. 김 변호사는 “그분들 인건비 대느라 단체 살림이 빠듯하다”며 웃었다.

김기남 변호사는 법학도 출신이다. 대학원에서 평화학을 전공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비영리단체에서도 일해보고, 로펌에도 있어봤지만 뭔가 모를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누굴까,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딘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분쟁지역 피해자를 돕자는 결심이 섰어요. 용기로만 되는 일은 아니죠. 2010년 아이티 대지진 구호 현장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가 전적으로 응원해주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김 변호사는 2020년까지 50개 마을에 대한 학살 보고서 완성을 목표로 한다. 작업이 완료되면 온라인에 ‘팩드파인딩뮤지엄(Fact Finding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보관소를 열어 공개할 계획이다.

“여러 생존자 증언을 종합하면 과거에는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와 불교도인 라카인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고 해요. 그러다 군부정권이 종교분쟁으로 비화시켜 무슬림 차별 정책을 펼쳐나갔다는 거예요. 다시 평화를 찾으려면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야 합니다. 진실이 묻히면 지속가능한 평화도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유엔국제사법재판소나 국제형사재판소에 전달하는 것, 그것이 저와 저희 단체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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