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현지 적응편
태국 UNESCAP(UN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 인턴기
2016년 11월 말, 초조함을 안고 인턴 지원 결과를 기다리던 내게 방콕 ‘유엔에스캅(United Nations ESCAPUNESCAP)’에서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유엔에스캅(UNESCAP)’은 연구 및 분석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정책 개발과 지역협력을 돕는 UN기구다. 이미 몇 차례 국제기구 인턴 지원의 고배를 마신 뒤라, 간절한 만큼 기쁨은 그 이상이었다. 사실 합격을 크게 기대하진 못했다. 스카이프(Skype)로 진행된 면접을 긴장 속에서 치른 터였다. ‘새천년개발목표(MDGs)’,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등 글로벌 이슈부터 국내 공적개발원조(ODA)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로 물어보는 면접 내내 진땀이 났다. 합격 통보를 받고 나자, 국제기구의 꿈을 품고 노력해왔던 하루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플루트 전공생, 국제개발협력 꿈을 품다
나는 플루트를 전공했다. 교직 이수까지 하고, 졸업 후 플루트를 연주하고 가르치며 살았다. 그 후 조금씩 돈을 모아 몇 차례 배낭여행을 떠났고, 우연히 뉴욕에 있는 유엔(UN)본부 투어를 가게 됐다. 단순히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적지 않은 금액을 투어비로 지불해야했다. 그때 ‘다음에는 이런 입장료를 내지 않고 저 직원들처럼 자유롭게 드나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의 황당하고 단순한 동기가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이야. 그땐 정말 몰랐다. 배낭여행을 하면서 개도국의 발전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국제개발협력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에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을 진학, 국제 평화학을 공부했고 국제기구 인턴으로까지 그 끈을 이어오게 됐다.
내가 인턴으로 일하게된 곳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유엔에스캅(UNESCAP). 그 안에서도 환경개발국(Environment and Development Division) 내 환경개발정책과(Environment and Development Policy Section) 업무를 맡게 됐다. 한 달여의 시간동안 복잡하고 까다로운 서류 및 비자 준비 과정을 거쳐, 방콕으로 입성했다.
◇사진만 봐선 몰라요, 이 한 몸 누일 곳
“우리 비행기는 현재 태국의 상공에 있으며, 방콕의 기온은 27도입니다.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0도에서 영상 27도로. 불과 5시간 차이로 나의 겨울은 여름으로 변했다. 내 덩치 만한 짐 뭉치를 이고 지고 보증금과 한달 치 월세를 미리 지불해 둔 숙소로 향했다. “싸와디~캅~(안녕하세요)” 반갑게 날 맞아주는 아주머니를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소는 이전 인턴에게 받은 숙소 목록과 방콕 유엔 에스캅에서 인턴 경험이 있는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결정했다.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의 숙소로 추린 다음, 기타 사항을 꼼꼼하게 따진 뒤 현재 숙소로 골랐다. 넓은 창으로 햇볕이 따스하게 쏟아지는 방의 탁 트인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창이 뚫린 방향이 황금빛 라마 8세 대교로 이어지는 곳의 초입이라 “우이이이잉~ 부아아아앙~” 등의 각종 차 모터 소리가 24시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가끔 가족, 친구들과 통화할 때 지금 밖이냐고 물을 정도니 말이다.
덕분에 한동안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몸을 실컷 두드려 맞은 것 같은 피로를 안고 살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창문은 A4 용지 세 장을 붙인 정도의 크기지만 훨씬 더 조용한 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약간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미리 숙소를 구한 덕분에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숙소를 구해야 하는 어려움은 없었다.
◇한 끼 해결 걱정 없으니 음식이여 그저 입으로 들어오라
짐을 다 풀고 녹초가 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뻗다시피 누워있었는데 슬슬 배가 고파졌다. 주변 편의점이라도 찾아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에스캅에서 일하는 학교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은 다 낯설어서 답답할 수 있겠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알아가자. 여기가 네가 주로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게 될 곳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선배와 전화 통화 후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배고픔은 더 심해졌다. 일단 거리로 나가 식당을 찾기로 했다. 숙소를 나와 얼마 걷지 않아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가득한 먹자골목이 나타났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 좁은 골목의 한쪽을 따라 간이 탁자와 플라스틱 의자가 줄지어 놓여있었다. 고소하고 풍성하며 음식 향기가 코안으로 스며들었다. 저 많은 음식점 중 어디에 들어갈까? 그래, 오늘 저녁은 게살 커리와 오동통한 새우가 담뿍 들어간 볶음밥, 기름으로 코팅된 초록빛의 아삭아삭한 모닝글로리 볶음이다. 고소하고 짭조름하며 적당히 기름진 맛은 이내 태국 음식을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도착 첫날부터 너무 맛있는 현지음식을 먹어서였을까, 앞으로 음식에 대한 걱정은 싹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만만찮은 현지적응 “그거 물갈이야!”
출근 전까지 적응 기간이 며칠 주어졌다. 나는 그 기간 동안 길거리 음식을 마음껏 탐했다. 그 중 기억 남는 메뉴가 어느 날 저녁 먹었던 노점 국수다. 시내를 나갔던 날, 나는 노점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고 일어서기가 무섭게 새로운 손님들로 자리가 채워지는 그곳에서 나도 한마디를 보탰다.
“원 똠얌 누들 플리즈”(똠얌 국수 하나 주세요) “오케이. 앤드 워터?”(알겠습니다. 물도 드려요?) “예쓰!”(네!)
아직 태국어가 전혀 입에 붙지 않아서 영어로 주문을 했다. 다행히 간단한 영어와 손짓, 눈빛으로 웬만한 소통은 해결된다. 9개의 테이블에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화려하게 꾸민 젊은 남녀,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앉혀 데려온 엄마와 아빠, 맥주 한 병 시켜두고 따끈한 쌀국수를 먹는 할아버지…. 남녀노소 불문, 많은 사람들이 삶의 노곤함을 따끈한 국수로 달래고 있었다.
그 사이 내 음식도 나왔다. 매콤 달콤 따뜻한 똠얌 국물과 고명으로 얹힌 어묵, 그리고 삶은 고기가 올려진 국수.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침이 한가득 나왔다. 한 젓가락 맛 보니, 맛도 훌륭하다. 고된 타지 생활이지만 맛있는 음식 덕분에 조금은 힘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미식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 출근 전날 저녁, 삼삼오오 모여 먹은 현지식이 문제였을까, 시원한 얼음을 갈아 만든 망고 스무디가 문제였나. 무엇이든 간에 첫 출근 날 그만 배탈이 나고 말았다. 식중독이라고 보기엔 함께 먹은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도 멀쩡했는데 나 혼자서 구토와 배앓이 그리고 고열로 끙끙 앓아 누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첫 출근해 내 얼굴이 새겨진 ID카드를 마주한 설렘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고통과 씨름해야만 했다.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크게 아프기 시작하니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음날 겨우 출근해서 점심을 제안하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각종 약과 대처법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허브로 만든 한방 향의 익숙한 알약은 효과가 으뜸이었는데 쉽게 구하지 못하는 중국식 약이라고 했다. 그래서 약의 포장지와 마지막 남은 한 알을 소중하게 보관하며 들어가는 약국마다 곽을 들이밀며 약을 구할 수 있는지 돌아 다니기도 했다.
“그거 물갈이야!” 출근 첫 주에 사무실을 비워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직속 상사는 내 증세를 듣자마자 물갈이임을 알려주었다. “왜 진작 아픈 걸 말하지 않았냐”며 대처법과 함께 퇴근을 권유하시는 상사 덕분에 몸을 마저 추스를 수 있었다. 꼬박 사흘을 그렇게 호되게 겪고 나니 섣불리 거리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여전히 다채로운 거리음식에 눈길이 갔으나, 6개월 동안 더는 아프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억눌러두기로 했다. 하지만 노점을 볼 때마다 ‘안 돼. 먹으면 또 큰일 나’라며 세뇌하듯 보낸 시간은 정말로 고역이었다. 특히 진한 숯불 향과 달콤한 양념이 입혀진 고기 향내를 맡을 땐 정말이지 한입 베어 물고 싶어 찔끔 눈물이 났다. 특히 유난히 인기가 많은 노점상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음식이 든 봉지를 든 사람들이 정말 부러웠다. 이후 깨끗한 환경의 음식점을 찾다보니 배탈은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생활비는 고공 행진했다. 한가지를 얻으니 한 가지를 잃은 셈. 이런 게 바로 타지 생활, 사회 초년생의 운명인가보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태국 방콕에 있는 UNESCAP Headquarters (유엔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에서 인턴으로 근무 중. UNESCAP는 러시아, 터키부터 시작해 태평양 소군도, 뉴질랜드까지 아우르는 아태지역개발의 중심기구로, 지역 연구 및 분석을 통해 각국의 정책 개발에 이바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