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순 늘품상담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인터뷰
“희수야, 잠깐만!”
2006년 경기도 수원시의 가출 청소년 쉼터. 상담을 받던 아이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아이의 손목은 성한 곳이 없었다. 여러차례 그어진 자해 흉터로 가득했다. 어제는 죽을 각오로 락스물을 마셨다고도 했다. 다섯 살 때 서울역 화장실에 버려진 이후 거리를 떠돌던 중학교 2학년생 희수(가명)였다.
상담가 최옥순(49)은 그런 희수를 붙들었다. 도움을 청하러 제 발로 쉼터를 찾아온 아이였다. 초등학생때 찾아온 엄마는 세 달만에 다시 떠났고, 아빠와 여관방을 전전하다 결국 가출을 택한 아이. 최씨는 아이가 미술치료를 통해 건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도록 하고, 개인상담과 심리치료를 병행하며 희수를 돌봤다. 4개월에 걸친 상담 마지막 날, 희수는 이렇게 말했다.
10년간 한결같이 희수와 같은 가출청소년을 품어온 한 여인이 있다. 수원시 늘품상담사회적협동조합을 이끄는 최옥순 이사장의 이야기다. 최 이사장은 청소년뿐 아니라 아동, 독거노인, 다문화가정 등 수원 지역 취약 계층의 심리 상담을 도맡아왔다. 지난 2014년 조합을 설립하고 만 3년 만에 그녀의 품을 거쳐 간 이들만 2300명에 달한다. 지역 사회 가장 외진 곳에서 이웃들의 마음을 돌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상담은 나의 운명…오히려 내가 행복하더라
“어르신들이 제가 나타나면 손뼉치며 너무 좋아하시는거에요.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다음에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셨대요. 그때부터였죠. 저의 상담 인생은(웃음).”
최 이사장이 처음부터 상담가의 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수원여성회에서 상근활동가로 활동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치매노인 미술치료’를 접했다. 미술 활동으로 치매 노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우울감을 극복하게 돕는 심리치료였다. 어르신들이 자존감을 되찾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접한 그녀는 한국미술치료학회에서 수련을 받으며 전문성을 쌓았다. 그리곤 요양병원, 재가센터 등 발길이 닿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무료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생활 환경이 어려운 곳곳을 다니며 상담을 하다보니, 이번엔 아동과 청소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참 많았다”며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예은(가명)이는 술만 먹으면 혁대를 풀어 때리던 아빠를 피해 쉼터로 왔어요. 가족이 붕괴되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가장 약한 아이들에게 돌아옵니다. 왕따를 당하거나, 나중에 사회에 나가도 한 일원으로 성장하지 못하죠. 그게 마음 아팠습니다.”
이후 지역아동센터, 가출 청소년 쉼터, 장애아동·청소년 시설을 찾아다니며 개인 상담과 집단 상담을 이어간 지 4년. 마음을 꽁꽁 묶어뒀던 아이들이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적장애 1급 아동들은 ‘선생님 좋아요’라며 문장을 만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상담을 통해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최 이사장은 ‘이 길이 내 길이다’고 확신했다.
◇ 취약계층 품어줄 공동체 필요해
아동과 청소년 상담을 지속하다보니, 그들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이 보였다. 상담을 받고 겨우 몸과 마음이 회복된 아이들은 다시 집에 돌아가 매를 맞고 가출을 번복했다. 최 이사장은 상담 효과가 지속되려면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건드려야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가족 상담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푸드테라피, 인도 만다라 미술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심리사 자격증을 부단히 취득했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아이들은 성장해야 해요. 그런데 공동체가 무너진 우리 사회는 오로지 가족의 책임으로 돌려버리죠. 아이들이 희망을 보고 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품어줄 공동체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2014년 4월, 최 이사장은 동료 상담사들과 함께 상담 협동조합 ‘늘품상담사회적협동조합(이하 늘품)’을 만들었다. 조합으로 시작했지만 그녀의 목표는 처음부터 사회공헌에 있었다. 조합원들에게도 수익이 남으면 전부 취약계층에 나눌 것이라 못 박았다. 그렇게 1년, 최씨는 사무실 운영을 위한 일부 자격증반 외에는 전부 지역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열다섯 명의 조합원들이 한 푼도 가져가지 않고 십시일반 몸과 마음을 보탰다. 최씨도 직접 후원금을 내면서까지 상담에 매달렸다. 늘품은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아동센터와 다문화 가정 아이들부터 무료로 상담했다. 상담사 자격증반을 운영해 지역에서 상담사들도 양성했다. 이렇게 배출된 상담가들과 함께 수원시에 있는 지역아동센터에 전부 상담을 나가게 됐다.
그녀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동뿐 아니라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 상담 비율도 늘리기 시작한 것. 최 이사장은 수원의 구도심인 서둔동, 구운동 일대 어르신을 찾아가 무료 푸드 테라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련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지역 보건소와도 MOU를 맺어 진행비를 지불해가며 독거노인 상담 프로그램을 열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정말 좋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세요. ‘너무 외로웠다’고. ‘이렇게 혼자 죽는 줄만 알았는데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이런 프로그램이 너무 필요하죠. 작은 네트워킹만 돼도 노인분들 고독사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차별과 편견으로 상처받은 다문화가정도 두고 볼 수 없었다. 최씨는 수원시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을 위해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지자체 예산 대부분이 한국어 교육에 집중돼 상담을 위한 여건은 열악했다. 최씨는 비용을 더 들여가며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상담도 따로 진행했다. 이렇게 지난 한 해 동안 제공한 무료 사회서비스가 전체 조합 활동의 51%에 달한다.
“속 얘기 할 곳 없던 여성들이 상담에 나와 하나둘 가정 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한 거죠. 집단상담으로 가정 내 폭력이 줄어들고, 매일 눈물로 하루를 보내던 여성들이 우울증에서 벗어났습니다. 한국인 남편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어요.”
◇ 더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현재 늘품에서는 임산부에서 장애 아동, 농촌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위한 16여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3월 초에는 고용노동부로부터 정식 사회적기업 인증도 받았다. 어느덧 정식 직원은 4명, 재능기부와 후원 등으로 힘을 보태는 조합원 수도 약 30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지역 내 취약계층을 모두 돌보기에는 역부족이다.
“유일하게 힘든 점이 있다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의 여건이 안돼 거절해야 할 때입니다. 독거노인 상담 프로그램은 지난해 말부터 못하고 있어요. 적은 인원으로 지역 내 어려운 사람들을 다 보살필 수는 없으니까요. 곳곳에서 ‘제발 해달라’며 요청이 들어오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참 힘듭니다.“
특히 다문화 가정의 경우, 올해 수원시의 사업 공모에 선정되지 않아 당장 30가구의 상담이 중단됐다. 상담을 요청하는 센터가 세 군데나 되지만 당장 100가구를 감당할 예산이 없어 프로그램 진행이 힘든 상황. 다문화 아동들은 한국 적응의 어려움으로 왕따를 당하거나 정서적 고통을 받기에 상담 프로그램이 시급한 상황.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취약한 빈곤계층 독거노인들 역시 정서적 지원이 절실하다.
최 이사장이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열심히 상담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력도 진행 여건도 모자란 실정. “몸이 힘든 게 아니라 도와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마음 아프다”는 그녀의 꿈은 지역 공동체에 늘품과 같은 시스템이 더 많이 생겨나는 것이다.
“수원 한 곳의 취약계층을 돌보는 것도 사실 어려워요. 늘품과 같은 공동체가 많아지면 더 많은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희수처럼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행복해질 수 있겠죠.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복지를 누리는 그 날까지 저는 쉼 없이 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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